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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론자 Dec 08. 2020

민수 이야기(5/5)

민수, 미래로

81.
피시방의 비좁은 화장실에는 ‘나’와 J, 둘밖에 없다. ‘나’는 화장실 문을 잠근다. 사람의 인기척에 J는 잠시 ‘나’를 돌아보지만 이내 신경을 쓰지 않고 참아왔던 오줌보를 갈기려고 바지춤을 급하게 추스른다. 그 순간 ‘나’는 J에게 달려들어 그의 옆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82.
묵직한 한 방이었다. 연이어 ‘나’는 그의 얼굴과 화장실 벽 사이의 좁은 틈으로 주먹을 꺾어 넣어 그의 인중을 노린다. J가 내 쪽으로 고개를 트는 바람에 주먹은 그의 반대쪽 턱에 비껴 맞는다. J가 ‘나’를 제대로 돌아봤다. 눈과 눈이 3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마주쳤다. J가 고래고래 소리치려고 입을 벌린다. 그때 냅다 어퍼컷. 턱의 반동에 혀를 콱 씹은 J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곰이 뿔났다.

83.
J는 ‘나’를 강하게 밀쳤다. ‘나’는 뒤로 날라가 화장실 벽에 몸을 부딪친다. 곧바로 J가 그의 육중한 몸을 ‘나’에게 날린다. ‘나’는 피하려는 움직임이었지만 J의 몸은 너무나도 비대했다. 머리와 척추 그리고 꼬리뼈에 걸쳐 순식간에 아찔한 고통이 번진다. 어째서인지 ‘내’가 받는 충격이 나에게도 전달됐다.

84.
‘나’는 J에게 꼼짝없이 깔렸다. J는 ‘나’를 제압한 상태로 ‘나’를 엉덩이로 깔아뭉개며 내 위를 점한다. 그는 우악스러운 손바닥으로 내 뺨을 갈겼다. “되겠냐?”, “아니 도대체 왜 까불지?” 등의 말을 뱉으며 계속해서 ‘나’의 뺨따귀를 후려댄다. ‘나’는 열심히 버둥대지만, 그의 마운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정신이 혼미하다. 무기력하다. 그의 체중이 나의 흉부를 심하게 죄어온다. 숨이 막혀오는 한편, 이 와중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그 녀석의 정체.

85.
쌍둥이 인격
그 녀석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었다. 원래부터 내 몸에 같이 있었다. 쌍둥이 인격. 태어날 때부터 한 몸에 두 명분의 인격이 들어가는 것.

86.
태초에 우리는 성향이 비슷했다. 우리가 둘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우리가 어렸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 녀석과 나와의 소통은 일절 없었고 사실 소통은 필요도 없었다. 우리의 생각은 거의 일치했다. 아마 몸의 주도권은 나보다 조금 더 기가 센 그 녀석에게 있었던 것 같다.

87.
다섯 살
어린이 집에서 ‘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한 아이가 빼앗아가 다툼을 벌였다. 어쩌다가 그 아이의 얼굴에 옅은 손톱자국을 남겼다. ‘나’는 어린이집 선생한테 배를 강하게 걷어차였다. 그 녀석은 실제로 기절한 듯했고, 나는 곰을 만나면 죽은 척하라는 잘 알려진 이야기를 떠올리며 기절한 척했다. 부모에게 전화가 갔고 우리는 빈혈로 쓰러진 것 같다고 통보됐다. 그 녀석은 기가 죽어 한참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몸의 주도권을 획득한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88.
초등학교 2학년
한 깝죽대는 녀석의 코피를 터트렸다. 지금껏 내가 우발적으로 그런 줄로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린이집 선생의 폭력으로 자리를 잃은 그 녀석이 조용히 폭력성을 키워가다가 불쑥 튀어나와, 묵혀 놓은 폭력성을 펑 하고 터트린 것이다. 그 녀석은 곧바로 다시 들어갔고, 혼이 나는 것은 내 몫이었다.

89.
초등학교 5학년
수련회에서 만난 다른 초등학교와 시비가 붙었다. ‘나’와 친구들은 수련회가 끝난 다음 주에 그 초등학교에 찾아가 패싸움을 벌였다. 패 싸움 도중 그 초등학교의 직속 중학교 선배들이 나타나 ‘나’는 머리를 엄청 얻어 맞았다. 사실 이 날의 일은 내 기억 속에 없다. 친구에게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 녀석 멋대로 폭주하다가 얻어맞은 이날이 그 녀석의 마지막. 그는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그 녀석은 폭력 때문에 그의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90.
그 녀석은 부활했고, 내가 정신적으로 흔들릴 때 다시 찾아왔다.

91.
나의 위기가 곧 그 녀석에게는 기회. 그는 내 몸의 지배를, 아니 ‘우리’의 몸의 주도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것인가. 그의 증명을 위해, 폭력의 행사를 위해.

92.
다시 화장실. 이윽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뭐야, 기절했냐? 싱거운 새끼.”
X는 기절한 ‘나’를 내버려 두고 다시 소변기로 간다. 나도 내가 기절한 줄 알았다. 하지만 기절한 건 ‘나’였다. 나는 깨어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곰을 만났을 때 죽은 척하면 산다는 메시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93.
X는 참아왔던 오줌을 시원하게 갈기며 혼잣말을 지껄인다.
“목요일도 그렇고 정신 나갔냐? 얄팍한 새끼가.”
갑자기 얄팍하다는 단어에 울컥한 나는 ‘나’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오줌을 누는 J의 뒤에서...

94.
이단 날라 옆차기. J의 등허리에 두 방 꽂으려 했는데 도움 딛기 과정에서 바닥의 물기에 살짝 미끄러졌다. 결국 그의 오금에 옆차기가 꽂혔다. 바닥의 물기는 나에게만 미끄러운 게 아니었다. J가 팔을 허우적대며 뒤로 엎어진다. 엎어져서 바둥댄다. 그의 오줌발은 한참 동안 끊기지 않는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구찌 청바지와 하얀, 발렌시아가 후드에 물이 든다. 노랗게, 노랗게.

95.
기숙사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나’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카톡을 보니 ‘나’는 목요일에 조모임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셨다. 분명 그날 J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 그것이 아마 ‘내’가 J에게 싸움을 걸게 된 결정적인 트리거다. ‘나’는 J가 게임을 즐기고 과민성 방광염을 갖고 있다는 정보와, 앱을 통해 그가 몇 시간 동안 내리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네모 피시방에 갔다. 그리고 J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J에게 맞섰다. 비록 넘을 수 없는 체급 차이에 지긴 했지만 ‘나’는 맞섰다.

96.
중요한 사실. 이번에는 나도, 도망치지 않았다. 나도 한 방 먹였다.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죽 밀려온다.

97.
눈이 떠졌다. 핸드폰을 켜 날짜와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2시. 다행히 일요일이지만 불행히 기말고사 하루 전이다.
“깨어 있어?”
나는 그 녀석을 부른다.
“나 기절하고 어떻게 됐냐?”
과장 조금 보태어 이야기를 풀어준다. 이야기를 듣던 그 녀석이 내게 묻는다.
“이제 우리 어떻게 할 거냐? 다시 내가 너 해?”
“번복해서 미안하지만, 나 좀 더 맞서보고 싶어.”
“그래 너 해라. 그게 맞지, 이제 와서 내가 무슨.”
그 녀석 무엇인가 하나 떠오르는 게 있나 보다.
“아, 마지막으로…”

98.
그는 나쁜 녀석이 아니었다. 그는 몸의 주도권에 욕심도 없었고, 그의 폭력성은 희석되어 있었다. 핸드폰 메모장을 보니 그가 나에게 남긴 메시지가 하나 있다. ‘시시해. 좀 더 맞서봐.’ 이는 내가 중학 시절 즐겨 읽은 만화 ‘우주 형제’에서 동생이 슬럼프에 빠진 형에게 해주는 말이다. 그는 늘 나와 함께였다. 똑같은 것을 보고 겪은, 하지만 조금 다른 것을 쌓아온 그는 다시 잠들었다. 거의 나오지 않았다.

99.
기말고사가 끝났고 이제는 방학이다. 할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평점
평점이 참담하다. 기말고사를 내가 보게 됐다. 그 녀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각 시험의 하루 전날에 공부하긴 했는데 하루로 해결될 분량이 아니었다. 또, C 언어 과제를 샀었는데, 표절 검사에 걸려 0점을 받았다. 정말 뿌린 대로 거뒀다.

전공 진입
알아보니 공학계열의 학생이 일반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과 말고도 융합 전공이라고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인 컬처앤테크놀로지과에 자기소개서를 써넣었다. 평점보다는 자기소개서와 면접을 보고 뽑는단다. 콘텐츠 개발을 하고 싶은, 또 다양한 것들에 도전하고 싶은 내 마음을 자기소개서에 담았다.

자아실현
매슬로 5대 욕구의 맨 꼭대기 층을 차지하는 자아실현. 급하지 않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나가니까 닿는다. 그만큼 요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유튜브
게임 영상을 계속해서 올렸다. 이제는 게임 영상 말고도, 다른 영상도 찍어 올린다. 문득 떠오른 콘텐츠를 담은 영상을 올렸다. 다른 유명한 유튜버들조차 우리의 콘텐츠를 따라 할 정도로 대박이 났다. 유튜브를 시작할 때에는 생각도 못 했던 조회 수와 구독자 수를 찍었다.

아르바이트
구청에서 모집하는 대학생 행정 인턴에 지원해 근처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복싱
팡팡. 글로브로 샌드백을 칠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난다. 그 녀석의 마지막 부탁은 내가 복싱 도장에 다니는 것이다. 우리, 쌍둥이 인격 간에는, 시야뿐만 아니라 감각마저 공유가 가능하다. 샌드백을 치는 타격감은 우리가 함께 느낀다. 매일 한 시간. 이 시간만은 정말로 우리 둘이 하나다.

100.
아르바이트하러 도서관에 가야 하는데 너무 졸리다.
"너 또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지?"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그 녀석이 말을 건네왔다.
“이젠 아니야. 너도 알잖아?”

100+
패딩의 지퍼를 죽 올리고 아파트를 나선다. 어느새 길거리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이어폰에서 신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래 볼륨을 기분 내키는 대로 올리다가 청력이 손상될까봐 볼륨을 조금 줄인다. 손이 주머니 안에서 춤을 춘다. 멜로디에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 근본 없는 발걸음으로 눈길을 미끄러지듯 걷는다. 나는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아무렴 어때. 지금이 너무 신나는걸. 뜬금없이 짧은 문구가 하나 떠오른다. 나는 나지막이 그 문구를 입 밖으로 뱉어본다.

“미래는 지금이야."



짧지 않은 제 새내기 시절 이야기가 담긴, 민수 이야기(1/5)~(5/5)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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