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생명공학, 그중에서도 유전공학이 꽤나 발전한 미래.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난 사람들은 꼬리표를 부여받았다. 유전자 조작을 통하면 신체능력이 압도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찍어낼 수 있었는데, 이들과 일반인들 간의 스포츠 경기는 절대 성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
꼬리표는 국제기구 차원에서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이는 올림픽,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서의 형평성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2.
위의 이야기는 꽤나 나중의 이야기이고, 그보다 십수 년 전에, 한국에 민수가 태어났다. 유전공학 기술 산물의 첫 세대의 아이. 한국 육상계에 폭풍우를 몰고 올 주민수.
3.
민수의 탄생에 사용된 유전공학 기법의 탄생에는 채 박사의 공이 컸다. 그런 채 박사는 어려서부터 빨리 달리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비단 달리기뿐만이 아니었다. 축구, 농구, 야구, 복싱, 그리고 다른 모든 스포츠에 사람들이 왜 그리도 열광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에, 어중간한 스포츠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어중간함이 르상티망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무의식이 어차피 완벽하지 못할 스포츠에 관심을 꺼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의 관심을 끌던 것은 오직 하나, 생명과학이었다.
4.
너무너무 쉬웠다. 초등학생인 민수는 압도적인 기록의 차이로 그와 같이 달리는 선수들을 절망시켰다. 당연한 결과였다.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다. 근거리 달리기에 최적화된 체격, 반응속도, 그리고 근수축 속도까지.
5.
채 박사는 민수와 접촉하지 않았다. 민수가 그와 같이 있는 모습이 포착되면 민수가 유전공학의 산물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채 박사는 민수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별다른 애정을 쏟지 않았다. 다만 그가 조금 더 완벽한 기록을 낼 수 있도록 그에게 유명한 달리기 코치를 붙여줬을 뿐이다. 그리고 '관찰'했을 뿐이다. 채 박사에게 민수는 흥미로운 실험체 정도로만 느껴졌을 것이다.
6.
앞서 말했다시피 민수는 1세대의 유전공학 아이였다. 아직은 절대 완벽하다는 말은 무리였다는 것이다. 치명적 결함과 부작용이 언제 어디서 도사릴지는 채 박사도 몰랐다.
7.
민수는 양아버지와 양어머니 산하에서 무럭무럭 자라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육상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7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학과 동시에, 이미 한국 대표로 예견되어 있던 3학년 선배 둘, 육상 경력 1년 만에 고등학교 체전에서 2등을 차지한 재능의 천재 최일 등과 한국으로 막 귀화한 피지컬의 천재 나건아를 제쳐버렸다.
8.
성인이 되기까지 그의 코치의 커리큘럼을 무사히 따른 민수는 당연히 올림픽 한국 대표로 선발되었지만 의외로 세계의 벽은 두터웠다... 라기에는 이미 유전공학 조작 인간이 세계 곳곳에서 판을 치는 것이 대한민국 유전공학의 석학, 채 박사의 눈에는 보였다(물론 민수도 혹여나 유전자 공학의 아이가 아닌가라는 논란이 터지긴 했었고, 채 박사는 민수와의 관계를 일절 부인하는 일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이는 채 박사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긁기에 충분했다. 민수의 패배는 곧 그의 공학기술의 패배를 의미했다. 채 박사는 얼른 조치를 취해야겠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9.
민수는 채 박사와 처음으로 접촉했다. 채 박사는 민수에게 아직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다만 그에게 더 빠른 속도를 주겠다고 회유했다. 한번 벽을 느꼈고, 대한민국 대표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고 있는 민수는, 무엇인가 께름칙했지만, 민수 역시 어중간한 것은 싫었다. 최고가 아니면 싫었다. 이미 그의 인생은 달리기가 전부였다. 유전자 가위 시술이 진행됐다. 불필요한 것이 잘려나갔고, 부족한 부분이 붙여졌다.
10.
주기적으로 유전자 가위 시술은 계속됐고, 민수는 점점 단축된 기록을 얻었으나, 어째 점점 사람의 모습과는 멀어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민수는 거울과 단축되는 기록을 볼 때마다. 자신의 인간성이, 마음이 점차 오려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11.
어느 날 민수는 심장에 이상함을 느꼈다. 이와 함께 점점, 그의 기록은 점차 엉망이 되어버렸다.
12.
민수와 채 박사가 좌절하는 한편, 채 박사의 라이벌 오박사의 민교가 대한민국의 빠른 별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부상하고 있었다.
13.
민수보다 두 살 어린 민교에게는 좀 더 정교한 유전공학 기술이 들어갔다. 민교에게는 민수조차 우수웠다. 그리고 유전자 가위 시술 기술도 채 박사가 한 수 위였다. 채 박사는 망가져가는 민수는 이미 글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달리기 선수들 중 유전자 가위 시술 대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14.
채 박사의 시술을 받은 사람이 대회에서 달리던 도중 모습이 완전히 붕괴하는 동영상이 촬영되었고 세계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안타깝게 그 시술이 채 박사에 의해 집도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엄연한 불법 시술이었으므로 채 박사는 분명히 심판을 받아야 했다.
15.
다음 올림픽, 한국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오박사의 민교도 별 힘을 쓸 수 없었다.
미국의 기술력은 아무도 능가할 수 없었다. 달리기 뿐만 아니라, 올림픽 대회 90%에 육박하는 종목에서 미국이 메달을 획득했다. 이 일을 계기로 유전공학 인류는 국제기구의 꼬리표를 받게 됐다.
16.
징역형에 처해진 채 박사는 정말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죄책감에,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던 민수에게 모든 것을 알려줬다. 조금이라도 너의 삶을 살다가라며, 민수의 남은 생을 편히 살다 갈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고 했다.
17.
그러나, 민수는 달리기 이외의 인생은 몰랐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달리기를 위해 설계되어 태어난 목숨이었다니. 그렇다면, 국제대회에서 참패를 당하고, 이제 달리지 못하게 된 그의 인생은 실패, 실패, 대실패가 아닌가?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그래도 민수는 운 좋게, 어쩌다가, 평생토록 자신의 심장을 바쳐도 좋을만한 짝을 찾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18.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민수의 심장이 머지않아 멈췄기 때문이다.
19.
미래, 사람의 유전자 조작은 어디까지 가능하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