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수많은 모듈로 구성되어 있다면 전체를 대표하는 하나의 모듈이 필요하다는 견해는 매우 유용하다. 마음을 하나의 정부로 비유할 때 당신을 대통령보다는 언론 담당관으로 여기는 편이 낫다. 이 견해는 인간의 심리학에 대한 몇 가지 혼란스러운 문제들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 <왜 모든 사람은 [나만 빼고] 위선자인가>, 로버트 커즈번
우리는 뇌의 기능에 기대어 내면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뇌는 스스로 쇼를 진행한다. 뇌가 수행하는 작전의 대부분은 우리 의식이 지닌 보안등급을 넘어선다. ‘나’에게는 그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 의식은 대서양을 건너는 증기선에 몰래 숨어든 아주 작은 밀항자와 같다. 이 밀항자는 발밑에 존재하는 거대한 기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여행의 공을 자기 몫으로 돌린다.
- <무의식은 나를 어떻게 설계하는가>, 데이비드 이글먼
우리는 하나의 단일한 자아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뇌와 몸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시작하며,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는 뇌세포들이 연결되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특정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뇌는 더 많은 것들을 성취합니다. 그런데, 데이비드 이글먼의 ‘나’라는 밀항자를 로버트 커즈번이 말하는 언론 담당관으로 여기는 편이 낫다니,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므로, 남들에게 자신이 쓸모 있고, 도덕적이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성’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마음 위원회 중에는 자신의 이미지, 평판을 관리하고 홍보하는 언론 홍보부가 있습니다. 언론 홍보부는 빅스비와 합심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근거를 총동원해서 자신감을 생성하고, 자신을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포장해서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어필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실험에서, 성인 남자들에게 미래의 직업적 포부를 설문지에 적도록 했습니다. 같은 공간에 여성이 있는 것만으로, 남자들은 ‘짝 찾기 모드’에 돌입해서 자신의 직업적 포부를 더욱 크게 작성했습니다. 여성이 그 설문의 내용을 볼 일이 없는데도,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작동해서, 행동이나 자기표현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다음의 세 가지 착각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일관성과 주체성(통제성)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일관적이며, 나의 몸과 생각, 행동에 대해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주체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앞서 보여드렸던 분리 뇌 환자에게서도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뇌는 걸으라는 암시(지시)를 받았고, 좌뇌는 “목이 말라서 물을 찾아 나섰다.”라는 자신의 주체성을 살리는 자기변호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야기 생성에 있어, 주체성과 통제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좌뇌(빅스비)가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입안 가득 초콜릿을 욱여넣는 모습을 친구에게 보였다고 합시다. 저는 두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1번, “내가 내 욕구를 거스르지 못하는 걸어 다니는 욕망덩어리라서”. 2번, “빠르게 열량을 보급하고 수십억 투자가 달린 중요한 발표 준비를 해야 하므로”. 어떤 이유를 만들어내는 친구와 같이 팀 프로젝트를 하고 싶으신가요?
또, 주사위를 던져 특정 숫자가 나와야 할 때, 많은 사람이 작은 숫자가 나와야 할 때는 주사위를 살살 던지고, 큰 숫자가 나와야 할 때는 강하게 던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주사위를 던지는 강도와 주사위의 숫자는 별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이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도덕성과 유능성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은 평균보다 더 도덕적이고, 능력이 있고, 심지어 이러한 자기 편향에 빠지는 착각도 덜 한다고 주장합니다. 메타인지도 평균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론적으로 절반은 평균에 못 미쳐야 할 텐데 말입니다. 한 실험에서는 팀 프로젝트를 마친 팀원들에게 각각 자신의 기여도를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그 기여도의 합은 100점이 나와야 하지만, 매번 160점을 웃돌았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낙관주의입니다. 자신은 왠지 더 운이 좋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벤트성 경품 추첨을 할 때, 확률이 낮더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여기서 나옵니다. 반대로, 안 좋은 사건 사고가 하필 자신에게 닥쳐올 확률은 더 낮게 평가합니다.) 통계적으로, 자동 추첨된 복권 한 장이나, 자신이 직접 번호를 고른 복권 한 장은 당첨률이 같을 겁니다. 그런데, 그 복권지를 일정 금액을 받고 양도하라고 했을 때, 자신이 번호를 고른 복권에 대해서는 6배나 더 높은 가격을 매겼다고 합니다. 또, 스포츠 경기에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한참이나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왠지 역전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가 희박한 낙관적인 느낌에 베팅하기도 합니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폭풍을 부를 수 있다길래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그리고 다들 재미로 하는 말이겠지만, ‘승리 요정(내가 경기를 직관할 때마다 이긴다)’도 주체성과 통제성, 그리고 낙관주의의 합작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효과적입니다. 남을 속이려면 무릇, 자기부터 속여야 하는 법입니다. (어미 새에게 가장 많은 먹이를 얻을 수 있는 새끼 새는 세상 제일 배고픈 척 어미 새의 부리를 쪼아대는 새입니다.) 뇌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취합해서 긍정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주변에 알립니다. 제가 자주 드는 예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기아로 굶주려가는 아프리카 소년 소녀들의 공익 광고로 마음이 한순간 찡해집니다. 하지만 저녁쯤, 그 슬픈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우리는 맛있게 밥을 먹습니다. 진짜 정의로운 사람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말로 정의롭다면 1분 1초도 쉴 틈 없이 모두를 도와주기에 바쁠 테니까요.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언론 홍보부가 자신의 모순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불편한 진실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뇌의 다른 모듈이 언론 홍보부에 특정 정보가 도달하지 않도록 제한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데이비드 이글먼이 말하는 ‘보안 등급’ 비유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남들에게 좋게 (포장해서) 알려야 하는 ‘나’에게는 일상의 시간 대부분, 그 정보(나의 못남과 모순을 다루는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로버트 커즈번의 책 제목 <왜 다른 사람들은 [나만 빼고] 모두 위선자인가>의 핵심인 ‘나만 빼고’에 웃음이 나면서도 슬픕니다.
비슷하게, 우리는 자신의 도덕적 결함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능력이 아닌 이런저런 상황적 이유를 찾아내서 붙이고, 타인을 평가할 때는 타인의 도덕성이나 능력을 탓하게 된다고 합니다. 자신에 관해서는 언론 홍보부가 자동으로 상황적 이유를 붙여가며 변명을 만들어내지만, 타인의 경우, 특히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경우 빠르게 그 사람의 인성이나 능력 탓으로 돌려, 빠르게 결론 내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하는 행위는 별도의 에너지를 지출합니다. 고작 20와트 전력으로 1000억 개가 넘는 뉴런을 운영하는 초고효율 뇌는 인지적 구두쇠입니다.)
[모듈의 관점에서 도덕과 위선을 바라보는 글을 부록에서 다뤄보고자 합니다.] 로버트 새폴스키에 따르면, 우리가 토사물을 봤을 때 느끼는 구역감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황을 봤을 때 느끼는 (사회적, 도덕적) 역겨움으로 확장되어, 뇌의 섬엽과 내장감각 등 같은 경로로 처리된다고 합니다. 역겨움은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비인간화하고) 혐오하는 데에 사용되는 감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