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위원회를 연다(‘나’는 조종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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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바이러스

앞 장에서 ‘내면의 목소리’이자 해설가인 우리 좌뇌 해석 장치가 바깥세상을 바라볼 때 어떤 이야기를 지어내는지 살펴봤습니다. 그 해석 장치가 내면을 비출 때는 어떤 이야기가 태어날까요? 이번 장에서는 ‘나’라는 직관적인 이야기를 파헤쳐보려 합니다. 이번 장으로 우리는 기자 역할을 하는 ‘나’와 ‘사용자’를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굳건한 조종사인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내 몸과 마음의 사령관, 그러니까 ‘단일하고 고정적인 형태를 가진 결정권자’라고 굳게 믿고 살아갑니다. 마치 내가 조종석에 앉아 있는 엘리트 조종사인 것처럼요.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만약에 내 몸을 조종하는 ‘내’가 있다면, 그 ‘나’를 조종하는 더 작은 ‘나’가 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나를 조종하는 나를 조종하는 ‘나’는 어디서 데려와야 할까요? 마치 마트료시카처럼, 자칫 무한 순환 논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이면 영혼 같은 초자연적인 설명을 추가할 필요 없이 뇌의 작동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 최종 결정권자로서의, 단단한 실재로서의 ‘나’는 없고, 뇌의 여러 부분이 상호작용하면서 ‘나’라는 사용자 감각이 부여될 뿐이다.” 그러면 이때, “하나의 단일하고 고정적인 물리적 형태를 가진 ‘내’가 몸의 조종석에 앉아 몸을 조종한다”는 생각은 ‘나’라는 이야기, 그러니까 ‘자아’에 불과합니다. 이야기는 ‘사용자’가 불확실한 이 세상을 직관적으로 헤쳐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해도 ‘진짜’는 아닙니다.



부분들의 합으로서의 나


뇌는 자신보다 덜 똑똑한 부분, 더 간단한 일만 처리할 수 있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그 기본 단위는 혼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뉴런입니다.) 뇌의 각 모듈은 서로 경쟁하거나 협력하며 복잡한 사안에서 의사결정을 하고 행동을 지시합니다. 지나친 단순화와 범주화를 무릅쓰고, 모듈의 예를 들면 심장 박동을 조절하는 모듈, 짝을 찾는 모듈, 음식을 탐색하는 모듈, 위험에 대응하는 투쟁-도피 모듈, 심지어 자신의 평판을 관리하는 모듈 등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보면 뇌에 모든 것을 지시하는 중앙 집권적인 결정자가 있기보다는, 다양한 안건을 두고 의견 충돌을 겪으며 합의점을 찾아 나서는 ‘정치 위원회’에 더 가깝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각 모듈은 특정 위치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기능과 관련이 있는 뉴런들의 네트워크로 봐야 하며, 모듈들이 철저히 독립적이고, 분리되어 있다기보다는, 서로 겹치기도 하며 긴밀하게 상호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연결성.)

중앙집권적 시스템에는 단일 장애점(Single Point of Failure, SPOF)이 존재합니다. SPOF는 동작하지 않으면 전체 시스템이 중단되는 지점입니다. 반면, 분산 시스템은 부분이 일부 망가지거나 기능하지 않더라도 전체가 제법 잘 작동하고 살아남습니다. (뇌의 신경 가소성 덕분에, 특정 뇌 부위가 손상되어도 다른 부위가 기능을 보완하거나 재학습해서 어느 정도 기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각 모듈은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도 제각각입니다. 장기적인 관점을 취하며 미래에 투자하는 모듈이 있는가 하면, 미래 따위 상관 않고 당장 눈앞의 달콤함을 즐기려는 모듈도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나와 야식의 유혹에 넘어가는 내가 공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미래 할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우리에게는 미래에 받을 큰 보상보다 당장 눈앞의 작은 보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100만 원 받을래? 아니면, 1년 뒤에 110만 원 받을래?’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이 당장의 100만 원을 선택하는 것처럼요.) 중요한 것은 언제라도 균형입니다. 언제라도 미래만을 내다보거나, 오직 이 순간만을 사는 사람은 적응력이 없을 것입니다.



모듈들의 위원회


우리의 뇌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특정 모듈이 주도권을 장악하며 유연하게 수많은 모드로 재편됩니다. 가령,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오면 투쟁-도피 모듈이 강하게 활성화되면서 다른 모듈들을 제한합니다. (먹던 것도 제쳐두고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소화계가 억제됩니다. 중요한 발표에 앞서 침이 마르는 것도 소화계 억제의 일종입니다.)

또, 단순히 매력적인 여성의 ‘사진’ 몇 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남성들은 ‘짝 구하기 모드’에 돌입합니다. 짝 구하기 모드는 미래를 왕창 할인합니다. 미래에 얻을 수 있는 큰 이득을 포기하고 당장 얻을 수 있는 자원을 ‘영끌’해서 눈 앞에 있는 이성의 환심을 사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특정 모듈이 어느 순간 주도권을 잡게 되면 그에 맞춰 ‘나’의 행동과 욕구도 시시각각 변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욕구와 모듈을 조율해서 균형을 잡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감정’입니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한다고 믿지만, 사실 생각의 시작과 끝은 항상 감정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게임을 하다가도 그만두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시험에 대한 불안감 또는 죄책감이라는 다른 감정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한 감정을 몰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합리적인 이성보다는 또 다른 감정)

다마지오의 신체표지 가설에 따르면, 뇌는 여러 선택지의 비용-편익 분석 작업을 실행해서 하나의 선택지를 고릅니다. 이때 신체표지란, 각각의 결과가 어떻게 느껴질지에 대한 내적 시뮬레이션으로, 일종의 (사고 실험이 아닌) 정서 실험입니다. 가능한 미래에 대한 정서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참고: 로버트 새폴스키, <행동>)

우리는 감정이 없다면, 충동적인 결정 없이 철저히 이성적인 판단만을 내리며 더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뇌의 손상으로 감정 인식 능력에 손상이 생긴 환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감정에 정돈된 숙고를 덧붙입니다. 특정 감정을 느끼면 그 감정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곰곰이 고민하다가 (여기서 해석장치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 감정을 해소하거나 증폭하는 방향으로 행동합니다. 결국 출발은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고 ‘편안한 감정’을 얻으려는 (혹은 ‘긍정적인 감정’을 극대화하려는) 감정적 동기에서 출발합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성은 정념의 도구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앞서 살폈듯, 우리는 ‘이 행동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까?’에 대해 생각할 때, 그 결과와 내가 느끼게 될 감정을 엮어서 생각합니다. (X라는 결과는 어떤 느낌일까?) 뇌 속의 다양한 모듈이 경합하고,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줄다리기할 때, 최종 판단 기준의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감정인 셈입니다. 감정은 어떤 모듈이 이 순간을 주도해서 헤쳐나갈지 결정하는 ‘채널’을 결정하는 리모컨과 같습니다.

가끔은 모듈들이 경합하는 내용 자체가 의식으로 떠오르기도 합니다. ‘나’라는 결정권자가 없는 모듈들의 경합이라면 뇌부적(뇌 + 내부적)으로 알아서 해결하면 될 텐데 왜 굳이 의식에 그 갈등의 내용을 올리는 걸까요? 우리 의식에 내면의 갈등이 올라오면, 우리는 특정 선택지에 정돈된 숙고를 더해보고, 그 내용을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며 집중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며 더 좋은 결정이 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용자는 의식에 떠오르는 내용을 대상으로 생각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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