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뇌가 마음함으로써 생기는 사용자

by 밈바이러스
뇌는 명사고, 마음은 동사다. - 마빈 민스키 -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하지만 어떻게 물리적인 뇌로부터 정신적인 것이 발생할까요? 심장은 명사고, “펄떡펄떡 뛴다”는 동사입니다. 그 과정에서 온몸에 피가 돌지요. 허파는 명사고, “호흡하고 산소를 포집한다”는 동사입니다. 그럼 뇌는 어떨까요? 네 맞습니다. 뇌는 명사고, ‘마음하다’는 동사입니다. 뇌가 몸과 연동하며, (특정 기능을 수행하려고) 마음하는 순간 ‘나’라는 사용자 감각이 피어나고 떠오르는 것입니다.


특정한 구조를 갖춤으로써 내재적인 힘과 시스템을 갖게 된 뇌가 수많은 정보를 특정한 방식으로 통합하면서 의식이 싹트게 됩니다(통합 정보 이론, IIT). 뇌가 매 순간 열심히 마음함으로써, 의식이라는 UI가 구성되고 우리 ‘사용자’가 인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사용자는 몸이라는 물리적 기반에서 태어나지만, 그 물리적 기반만으로는 사용자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뇌를 그대로 복사해 봤자, 뇌가 그 복잡한 연결성을 기반으로 제대로 ‘마음’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는 ‘사용자’라는 감각이 싹틀 수 없습니다(경험은 계산에서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 의식에 자부심 가져도 좋다’의 글을 부록에 첨부합니다.]



동사냐 명사냐


우리 뇌는 단단한 형태를 가지고 유지되는 하드웨어라기보다는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그 내부 구조를 바꾸어가는 촉촉한 웨트웨어입니다. 우리 의식은 계속 형태를 바꾸어가는 웨트웨어의 “마음하기”라는 동적인 행위로 태어나므로 사실상 뇌와 의식, 사용자는 보통의 일반 명사가 아니라 다이내믹한 흐름이자 동사형으로 봐야합니다. 제가 지금껏 사용했던 ‘사용자’는 동사에 가깝지만, 편의상 동명사의 느낌으로 사용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흐름으로서, 그러니까 동사로밖에 존재하지 않다가, ‘나’나 ‘너’가 붙잡으려고 이름을 붙이니 명사가 되어버린다. 마치 전자의 이중슬릿 실험을 보는 것 같습니다. 빛처럼 입자이면서 파동인 것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이중성이 가능한 걸까요? 이 시점에서 잠시 “언어”가 무엇이고,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진화생물학자는 언어 없이는 우리는 아직도 원시인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우리 빅스비와 기자의) 가장 강력한 생각 도구인 언어는 어디서 왔을까요?



언어의 기원과 그 진화


닉 채터는 그의 책 <진화하는 언어>에서, “언어는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시키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무수한 즉흥 교환의 과정에서 진화해 온 산물이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언어는 처음에 동물이나 사물, 사건을 지시하는 단어 몇 개로 시작됐습니다. 당연히 문법 체계도 없었습니다. 초창기 언어 모델에서는 단어가 풍부하지 않아, 새로운 의사소통적 도전을 해결하기 위해(저걸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전하면 좋을까?) 매번 창의력을 발휘해서, 손짓과 음성을 창작해 메시지를 전해야 했습니다. 성공적인 손짓과 음성은 축적되거나 변형되어 다음에 직면한 의사소통 과제에 쓰이게 됩니다. 그 성공적인 소통들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언어의 체계적 패턴이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몇 개의 단어로 시작된 언어는 더 많은 단어와 어느 정도의 문법 체계를 갖춘, 간소한 언어 체계로 진화합니다. 의사소통 하면서 학습과 사용이 반복되다 보면 어휘가 확장되고(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어휘도 생김) 복잡한 문법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더 복잡한 의미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어는 순간의 순간의 필요가 만들어낸 서툴고 무질서한 소통들이 시간을 거쳐 어느 정도 정교화된 것입니다.



언어의 한계


언어는 나름의 정교한 체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용하는 데 그럭저럭 문제가 없을 정도로만) 엉성하고 빈틈이 있기도 합니다. 언어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진화 중이나 본질적으로는 “불완전한 체계”인 것입니다. 많은 철학자나 언어학자, 수학자들이 완전한 표현 체계에 대한 탐구를 시도했으나, 실패에 그쳤습니다. 보다 객관적이고 엄밀한 수학 기호로도 어떤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불완전한 체계라고 했는데, 그럼 완전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좌뇌는 세상을 둘로 구분하고 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를 ‘범주적 사고’라고 합니다. 우리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범주적”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저것이라는 개념이 필요합니다. 행복과 불행, ‘없다(0)’와 ‘있다(1)’, 흰색과 검은색은 서로에게 의존합니다. 파란색은 우리가 쪼갤 수 없는 무지개를 7등분해서 떼어낸 한 조각에 불과합니다.


(흑백보다는 낫지만, 세상을 범주가 아닌 스펙트럼으로 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범주적으로 사고 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부터 범주적인 것과 비범주인 것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범주적 언어와 사고를 통해, 어설프게나마 세상을 우리가 소통하고 이용할 수 있는 정보로 번역합니다.



언어에 속지 말 것


크리스 나이바우어는 그의 책 <자네 좌뇌에게 속았네>에서, 언어란 어떻게 보면, 지도 만들기의 한 종류라고 말합니다. “지도가 그림이라는 상징을 이용해서 어떤 장소를 대변하듯, 언어는 단어라는 상징을 이용하여 다른 어떤 것을 대변한다. 예를 들어 의자는 의자라고 불리는데, 우리가 의자를 레몬이라고 부르더라도, 그것이 앉기에 아주 좋은 물건임에는 변함이 없다. 좌뇌는 현실에 대한 지도 제작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이때 지도를 그리는 펜이 바로 언어다.”


우리는 불완전한 체계인 언어로 열심히 세상을 단어로 옮겨,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언어로 묘사한 세상과 세계 그 자체에는 필연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메뉴판을 음식으로 착각해서 뜯어 먹지 말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또 우리는 네이버 지도 위에서는 축구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신과,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목소리의 관계는 지도(‘나’라는 이야기)와 실제 장소(진짜 ‘나’, 제 표현으로는 사용자)의 관계에 대한 완벽한 예”라고 합니다.


“언어는 효과적이지만, 너무 의존하면 현실에 대한 지도(언어)를 현실 자체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지도를 현실로 착각하게 되면, 좌뇌에 의해 창조된 언어로 된 세계를 장님처럼 떠돌게 된다.”


“말 그 자체는 실제로 나에게 어떤 피해도 줄 수 없다. 다만 그 말에 대한 좌뇌의 해석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치명적일 수도 있다.”


만약 머릿속 목소리를 진짜 ‘나’로 착각하는 순간, 도구가 나를 사용하는 상황이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어의 불완전성이 빚어내는 수많은 모순과 함정에 빠져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 죽어라 싸우고, 괜히 자신을 불쌍하게 괴롭히게 되기도 합니다. 말장난에 홀랑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내면의 목소리는 ‘사용자’가 아니다!
‘나’라는 기자도, 이야기도 ‘사용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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