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 -
앞서 내 몸과 생각의 주인이라는 확고부동한 ‘나’라는 물리적(정신적) 실체는 하나의 이야기에 가깝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나’라는 이야기의 힘이 왜 이렇게나 강력하게 느껴지는 걸까요? 그 중력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원시적인 뇌를 가진 바닷가재도 자신의 몸에 대한 느낌이 있어서 자신의 앞발을 먹지 않습니다. 동물은 자신의 몸에 대한 느낌을 기반으로 움직임을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몸에 대한 감각과 기초 의식, 우리가 시시각각 지어내는 이야기(특히 내 몸을 온전히 통제하는 것은 ‘나’라는 조종사 이야기)가 결합되어 ‘확고부동한 나’라는 관념이 생깁니다. ‘확고부동한 나’라는 느낌은 강력한 중력을 발휘해서 순간순간 발생하는 ‘나’에 대한 여러 이야기(자신의 선호, 취미, 가치관, ‘과거의 나’, ‘지금의 나’, ‘미래의 나’)를 끌어당기고 이어 붙이고, 편집해서 삶이라는 이야기를 만듭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좌뇌 해석기나 기자로서의 ‘나’로부터 나온 것이며, 자고 있을 때나 몰입했을 때, 언어 의식이 작동하지 않을 때 이야기가 지어내는 ‘나’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는 잠깐 자리를 비우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뇌가 ‘나’라는 캐릭터를 내세울 필요가 없어서 굳이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 뇌는 ‘나’라는 캐릭터를 지어내지 않고 다른 업무를 처리합니다. 가령 축구를 할 때는 ‘나’라는 말 많은 조종사 캐릭터는 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뇌와 몸은 오직 우리 진영과 상대 진영을 오가며 공을 상대방 골대에 집어넣는 과업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결국, ‘나’라는 확고부동한 존재자라는 실체는 착각이라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적 필요에 따라 등장하는 ‘등장인물’에 가깝습니다. ‘나’라는 이야기가 불러오는 자아 착각을 세밀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닉 채터는 그의 책 <생각한다는 착각>에서 심오한 내면의 깊이를 가진 ‘확고부동한 내’가 환상임을 ‘소설 고멘가스트에 나오는 성’의 비유를 들며 설명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성을 독자가 그림으로 옮겨 그려보려 하면, 소설가가 묘사한 각 세부 사항이 물리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구조임이 드러납니다. 닉 채터는 이처럼, 우리 마음속에 복잡하지만 일관된 내면세계를 품고 있는 확고부동한 ‘나’라는 것이 언제라도 존재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소설가가 특정 장면에 필요한 성의 부분을 즉흥적으로 구상해서 묘사하듯이, 자아 역시 필요한 순간에 적당한 정보를 활용해서 즉흥적으로 ‘구성’해서 등장하는 캐릭터라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성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계속해서 자신의 구조를 바꾸는 성일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뇌에서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매 순간 뉴런 간에 시냅스라는 연결 구조가 새로 생기거나 그 연결 강도가 조절됩니다). 과거는 뇌의 변화로 남습니다. 뇌는 계속해서 그 구조를 바꾸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주변 상황과 맥락도 계속해서 바뀝니다. 그러니 연출되는 캐릭터(‘나’)도 항상 바뀝니다. 의식 과학자 크리스토프 코흐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같은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더라도 매번 결코 같은 상태가 아니며, 시각 중추의 신경세포 내부에 있는 시냅스와 세포 소기관은 끊임없이 동요하는 상태에 있으며, 그 값은 1밀리초마다 요동합니다. 무릇, 우리가 ‘나’를 생각할 때, 그리고 ‘나’로서 경험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음은 크리스 나우바이어의 <자네 좌네에게 속았네>에 나오는 체험입니다. 잠깐 허리를 피고 스트레칭도 할 겸,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봅시다. 무엇이 보이나요? 세상을 볼 때 우리는 눈앞에 있는 수많은 ‘빈 공간’은 무시하고, 책, 책상, 창문처럼 구체적인 사물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는 빈 공간 자체의 존재와 깊이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보이는 사물에 이름표를 붙이고, 분류하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씁니다. 뇌는 진화적으로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에 집중하고 그걸 파악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입니다.
위의 내용을 우리 내면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 감정, 기억들이 물처럼 흘러가는데, 우리는 그 흐름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파동으로 보지 못하고), 그중에서 뭔가 “붙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것(입자)”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죠.
마치 밤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 중에서 몇 개를 골라 선으로 이어보고 저건 큰곰자리(‘나’)라고 이름 붙이고, 별자리와 관련된 설화(‘나’에 대한 이야기: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과거에는 이랬지만, 미래에는 이렇게 되고 싶어)를 만들어 큰곰자리에 부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별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강력한 해석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 해석기가 우리 안을 향할 때, “생애 동안 일어난 수많은 사건, 행동, 경험들 속에서 어떤 임의적인 패턴을 찾아내고, 그걸 설명하고 납득하기 위해 일관성 있는 ‘나’라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것의 본질이 어쩌면 뇌가 현실과 내면을 해석하고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밤하늘의 별자리나 소설 속 성처럼 허구적인 구성물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내면을 들여다보며 고정적인 ‘나’를 찾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뇌의 해석 습관 때문에 저지르는 착각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나’라는 허구적인 존재를 위해 애쓰기 때문”이라는 위무위의 말도 이해가 갑니다. 실체가 없는 것을 위해 발버둥 치니, 당연히 만족할 수 없겠지요.
우리는 계속해서 좌뇌의 놀라운 ‘해석기’ 기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해석기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궁극적으로 ‘나’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능력은 ‘어떤 것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서’ 출발했으며, 복잡한 사회 생활 속에서 진화했습니다.
1. 타인을 이해하는 전략: 지향계의 발달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 특별한 전략을 사용합니다. 바로 대니얼 데닛의 ‘지향계(Intentional Stance)’입니다. 대상이 욕구나 의도 같은 정신 상태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가정하는 겁니다. 저 멀리서 점점 커지는 점이 ‘나를 먹으려고 다가오는 굶주린’ 맹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다음 행동(도망)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타인을 합리적인 행위자라고 여기고 상대방에게 의도와 믿음을 투사하면서 다음 행동을 예상하려 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마음이 없는 것이 분명한 자연물(비나 바람)에게도 마음과 의도를 투사합니다. 그것이 우리 조상의 애니미즘입니다.
아이들이 로봇과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상상할 때도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로봇에게는 악당과 영웅, 인형에게는 가족이라는 아주 인간적인 역할과 마음을 부여하며 놉니다. 이를 보면 해석기나 지향계는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되고 발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동그라미 세모 네모가 임의적으로 움직이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에서도 아이들은 어떤 도형이 착한 도형인지를 추론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런저런 것들에 더 섬세하게 마음을 부여하며, 아이들보다 훨씬 복잡한 드라마를 만들어냅니다. (그중 하나가 인생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우리는 타인(혹은 자연물)의 행동에 그럴듯한 설명을 붙이며, 혼란스러운 세상을 더 잘 예측하고 대응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2. 책임의 압력: 상호-이유 대기 게임의 강화
어린 시절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에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라는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날지를 모르죠. 어른들은 아이들의 질문에 열심히 답을 해주려고 하지만 이내 당혹스러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세상에 이유를 묻는 것을 점차 그만두고 대신 서로에게 존재와 행위의 이유, 즉 책임을 묻기 시작합니다.
이는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상호-이유 대기 게임’입니다. 데닛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것을 요구하고, 그렇게 얻은 설명을 바탕으로 상대를 판단하거나 보증하고, 반박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거나, 타인 또는 사회가 제안한 이유에 의거해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책임감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정되며,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취급을 받는다.”
지향계와 상호-이유 대기 게임은 우리가 자아라는 이야기를 개발하도록 하는 강력한 엔진이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의 행동에 ‘이유’를 부여하고 ‘설명’을 요구하며, 이 과정에서 ‘나’와 ‘너’라는 자아가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행위자라는 서사를 구축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해야하는 압력 아래, 자신의 평판을 관리하는 ‘언론 홍보부’가 빅스비와 함께 ‘자아’를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게임의 과정에서 언어도 점차 정교해졌으며, 우리는 자신의 역할에 책임을 지며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키워갔습니다.
3. 해석기가 안을 비출 때. ‘확고부동한 나’ 관념의 탄생
이 과정에서 해석기는 단순히 외부 대상, 타인의 행위와 의도를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저 친구가 내게 요구해오는 ‘나의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서 소유해야 했습니다. 즉, ‘내가 너를 지향계로 보고, 너도 나를 지향계로 보는 과정에서, 해석 기능은 강화되었고,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기 자신을 지향계로 보고, 자신 역시 하나의 대상처럼 바라보며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읽어보려고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조상은 주체적이고 일관적인 친구와 사냥에 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리저리 튀고 제멋대로인 친구와 사냥에 나서면 많은 위험이 따를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협력할 생각이 있는 책임감 있는 사냥꾼’이라는 캐릭터를 투사하고, 또 믿습니다. (스스로 훌륭한 사냥꾼인 척하거나 상대방에게 훌륭한 사냥꾼의 이미지를 기대하면, 실제로 훌륭한 사냥꾼이 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나’라는 이야기의 구조가 발달하고 자리잡혔을 것입니다. 물론 그 출발은 제대로 된 언어적 사고보다는 느낌과 이미지였을 것입니다.
지향계, 상호-이유 대기 게임, 해석기로 내 안을 비추기. 이런 과정에서 ‘확고부동한 나’라는 관념, ‘나’라는 내러티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이야기가 가진 강력한 중력이 순간순간 피어나는 다른 수많은 이야기(자신의 이유, 선호, 취미, 가치관, ‘과거의 나’, ‘지금의 나’, ‘미래의 나’ 등)를 끌어당겨서 ‘나’라는 이야기와 느낌, 즉 ‘에고’를 다시 강화합니다. 다만, 앞서 예를 들었던 훌륭한 사냥꾼이라는 ‘나’는 사냥에 나서는 상황 맥락에 한정적으로 유용한 이야기와 이미지일 뿐입니다. 결코 영속적이고 본질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뇌는 생존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생성하고 해석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이 ‘나’라는 내러티브(=자아)입니다. 자아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 개념이 갖춰지지 않은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손가락을 다친 것을 보면, ‘내가 아프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도 모두 안다고 생각합니다. (영유아 역시 1인칭이기는 하지만, 다른 시점이 있는지 모르는 모든 것이 ‘나’인 1인칭입니다. 참고: 틀린 신념 과제, 대상 영속성) 아이는 커가면서 자신과 외부 세계, 그리고 타인을 인지하고 분리해 갑니다. 인간적인 ‘자아’는 발생하고 발달하는 것입니다. 뜬금없이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데이비드 헤이그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의 눈을 통해 나를 보고, 타인은 나의 눈을 통해 그들 자신을 봅니다. 투영과 투영의 투영 속에서 내 관점과 타인의 관점을 오가며, 내 행동의 여러 동기 사이를 조율하고 판결을 내리려 노력할 때, 책임감과 자아의식이 싹틉니다. 그리고 그는 “생물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실시간으로 해석하고, 세상에 관한 정보를 활용해 유효 결과를 도모하며 결정을 내린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 이전에도, 분자 기계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해 왔습니다. 해석의 수준은 진화합니다. (그리고 의미는 해석 과정의 산물입니다.)
“삶은 해석이다. RNA 세상이 시작된 순간부터 지금껏 펼쳐지고 있는 상속 가능한 행위자들 간의 해석 무기 확장 경쟁은 갈수록 복잡하게 발달한 행위자가 이전엔 불가해하던 것들을 마침내 이해하도록 이끌었다. 새 정보를 얻었거나 옛 정보를 새롭게 해석한 행위자는 인지력이 떨어지는 행위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원을 발굴하고 절묘하게 은폐된 위험물을 피할 수 있었다.”
- 데이비드 헤이그, <다윈에서 데리다까지>
자아는 늘 그곳에 굳건하게 있는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라, 그때그때 변화하는 뇌가 닥쳐오는 상황, 그리고 자신의 내부 감각을 추적해서 뇌가 실시간으로 만들어내는 내러티브입니다. 뇌는 계속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학습하면서 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과 감정 상태도 시시각각 달라집니다. 뇌는 그 변화무쌍한 입력값들을 가지고 “아, 지금 나는 이런 상황이고, 이렇게 느끼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하고 즉석에서 스토리를 짜냅니다. 매번 조금씩 다른 스토리가 나오기 때문에, 등장해야 할 캐릭터도 조금씩 다릅니다. 눈 결정을 보면 겉으로는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떤 눈 결정도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리사 펠드먼 바렛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해 내 신체 감각이 의미하는 바가 감정이며, 그 감정은 특정 행동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흔들다리 실험에서 지원자가 심장 박동을 사랑으로 착각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감정은 적극적인 행동을 요청합니다. 특정 순간 감정과 함께 피어난 ‘나’라는 캐릭터가 그 감정을 기반으로 행동을 구성하고, 세계와 상호작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건 미리 써놓은 대본대로 움직이는 배우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상황을 봐가면서 애드리브를 치는 코미디언 같은 느낌입니다. 뇌가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자, 이번엔 이런 ‘나’를 보여주지!” 하고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동일한 사람에게 두 개 이상의 정체성이 번갈아 나타나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됩니다. 다중인격 환자들을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한 몸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특별히 이상한 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매년 5명 중 1명이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상황마다 다양한 버전의 나를 연기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의 나, 부모님 앞에서의 나, 친구들이랑 있을 때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 화장실에 가기 전의 나와 화장실에 다녀온 나, 잠이 부족해 피곤한 나, 최고 컨디션이라 잔뜩 고조되어 있는 나. 모두 조금씩은 다릅니다.
결국 ‘진짜 나’라는 게 있는 건지, 아니면 상황마다 뇌가 만들어내는 여러 버전의 ‘나’만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보통의 뇌라면 이런 다양한 ‘나’를 매끄럽게 이어 모두가 다 하나의 ‘나’라는 감각을 유지해줍니다. 매끄러움을 잃어버리고 ‘단절’을 지각하게 되는 것. 그것이 해리성 정체성 장애입니다. 한편, 조현병을 가진 사람은 내면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느끼는 사람입니다.** 외계인 손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내 손이 내 손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의 신체를 절단하고 싶어하는 BIID 환자도 있으며, 심지어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코타르 증후군도 있습니다.) 반대로 가짜 팔 실험에서는 자신의 손이 아닌 가짜 손을 망치로 내려치는데도 마치 자기 손이 망치에 맞은 것처럼 반응합니다. 누구는 뇌의 일상적인 작업(편집을 통한 매끄러운 연결)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의식하지 않지만, 누구는 그 편집이 더없이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겁니다.
특정 상황에서 피어나는 나를 나같지 않다고 느끼는 것. 저는 이것을 게슈탈트 붕괴(순간적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거나 의미를 상실하는 상황)의 일종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이질감, 미시감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친구와 탁구를 치는데 갑자기 탁구를 쥔 채가 더없이 어색하게 느껴지고, 연속해서 실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금세 경기로 돌아가서 집중하긴 했지만요. 갑자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를 느낀 것입니다. 뇌는 보통, 순식간에 피고 지는 여러 가지 ‘나’라는 이야기를 매끄럽게 연결해서 우리에게 ‘나’라는 ‘일관적인 존재’라는 감각을 제공합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모든 이야기를 ‘나’라는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통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나’의 통제감을 벗어나서,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 내 삶이 내 삶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너무나도 이상하고 너무나도 낯선 게슈탈트 붕괴를 느끼기도 합니다.
열역학 2법칙을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방에게 ‘알고 있느냐’고 넌지시 물어보는 것(예/아니오)입니다. 더 정확하게 물어보고 싶다면 시험을 보면 됩니다. 가령 “책을 좋아하시나요?”라고 넌지시 물으면, 저는 책을 좋아한다고 답할 겁니다. 하지만 친구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면 책은 뒷전으로 하고 영화를 보러 갈 것입니다(시험의 방식). 우리는 자신의 선호가 이미 다 정해져 있다고 믿습니다. 내면의 깊은 어딘가에 미리 기록되어 있는 선호와 가치관을 그저 불러오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 것이죠. 하지만 시간, 배고픔, 상황, 그리고 누가 묻느냐에 따라서 제 선호와 가치관은 달라집니다.
가령, 한 실험에서 볼펜이랑 지폐 중에 피험자에게 하나를 선택해서 가질 수 있게 했습니다. 대부분의 실험 참여자는 돈을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선택지에 값싼 볼펜을 하나 추가해서 제시하는 것만으로 선호는 돈에서 볼펜으로 헤까닥 바뀌어버립니다.
페테르 요한슨 교수의 선택 맹목 실험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험자가 여러 장의 사진(주로 사람 얼굴 사진)을 보여주고, 피험자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도록 합니다. 그렇게 참가자는 선택을 하고, 실험자는 참가자가 선택한 사진을 참가자에게 줍니다. 여러 차례 선택이 이어지다가, 어느 시점에 참가자가 사진을 고르면, 이번엔 실험자가 교묘한 ‘카드 마술’ 기술을 써서 참가자가 고른 사진 대신 다른 사진을 건네줍니다. 그러고는 참가자에게 “이 사진을 고른 이유가 무엇인가요?”하고 물어봅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자신이 고르지 않은 사진인데도, 그 사진을 고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유를 지어내서 설명합니다. “음... 이 사람의 눈빛이 참 깊고 지적여 보여서 좋았어요” 라든가, “전체적인 분위기가 편안해서 끌렸어요” 같은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는 자신이 고른 사진이라고 믿고 만족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선호’나 ‘선택의 이유’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고,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미 선택을 했어. 이제 그 선택의 이유를 찾아야 해. <매트릭스>)
요즘에 핫한 AI 알고리즘을 예로 설명을 이어가보겠습니다. 체스 알고리즘이 경우에 따른 모든 수를 암기하고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둑의 경우는 더더욱 말이 안 됩니다. 경우의 수를 계산해봅시다. 바둑의 매 차례에 각자 4가지 수만 둘 수 있다고 해도, 4를 300번 넘게 곱해야 하는 천문학적인 수준의 경우의 수가 생깁니다.
바둑 AI는 결코 모든 수를 암기하거나 미리 정해진 선호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현재의 바둑판이라는 맥락(상황)을 분석하여 인간의 직관처럼 경험적으로 유망한 수를 몇 개로 추리고, 학습된 가중치(신경망의 연결 강도)를 바탕으로 다음 수에 대한 예상 승률(선호)을 실시간으로 계산해냅니다.
바둑 알고리즘의 사례는 인간의 선호가 유동적인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의 선호도 마치 바둑 AI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고 현재 상태와, 맥락에 의존적이며, 과거 경험과 학습을 통해 형성된 뇌의 ‘가중치(신경 연결 강도)’에 따라 유동적으로 발현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바둑 AI는 ‘계산된 선호’를 통해 어떠한 새로운 국면에서도 태연스레 바둑을 둡니다. 우리 역시 고정된 선호가 아니라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계산되고 재구성되는 ‘유동적인 선호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상황에 맞는 사회적인 ‘가면’을 쓴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당연히 친구 앞에서의 나, 가족 앞에서의 나, 회사 속에서의 ‘나’는 전부 다릅니다. 우리는 수많은 가면을 이미 가지고 있고, 상황에 맞는 가면을 직접 골라서 쓰는 것일까요? 가면이 몇 개 정도 미리 준비되어 있어서 준비된 가면 중에 하나를 내가 골라서 쓴다는 것은 뇌의 창조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는 자신의 본래 성격을 전부 잊고, 현재 맡은 배역에 몰입합니다. 천재적인 배우에게 만 가지 배역을 맡기면 그는 전부 척척 소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즉석에서, 임기응변으로 수천수만 가지 캐릭터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못 본 지 1년도 더 된 반가운 친구가 절친의 전 연인과 함께 걸어가는 상황에서도 즉각 대응할 수 있게 됩니다. 준비된 몇 개의 가면은 캐릭터들의 지나친 단순화와 범주화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처음 맞이하는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제법 어울리고 알맞은 ‘나’를 즉흥으로 연출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뭐를 좋아해?”라고 묻는 것은, 두 번은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 나의 역사, 특정 상황과 맥락 등이 모두 어우러져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단 한 번뿐인 캐릭터”에게 묻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자신과 관련된 어떤 의미론적 기억은 꺼내기 너무나 쉽습니다.*** 그 문장을 부호화하는 뇌세포들의 연결이 제법 강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캐릭터를 내보인 ‘나’는 이윽고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다행히 전전두엽이 상황과 맥락에 맞지 않는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려는 ‘나’를 대부분 억제해줍니다. 철도 공사 현장에서 전두엽에 손상을 입어 성격과 행동이 바뀌어 완전히 이상하게 행동하게 된 피니어스 게이지의 사례가 있습니다.)
종합하면, ‘확고부동한 존재’와 그가 활용할 수 있는 언제라도 인출될 준비가 되어있으며, 절묘한 순간을 기다리는 보물과도 같은 생각과 가치관, 선호와 가면을 모두 품고 있는 ‘내면의 깊은 바다는 없다’입니다. (모든 상황에 쓸 데이터베이스를 미리 전부 구축해뒀다기보다는 강력한 생성형 엔진을 품고 있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마치 다음 행동을 계획하거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어떤 정보를 참조하고 끌어오려합니다. 하지만 닉 채터에 따르면, 자기 성찰은 ‘내면의 바다’를 단순히 들여다보고 지각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새로운 이야기나 설명을 즉흥적으로 고안해내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뇌는 고안과 생성을 합니다. 고정된 선호를 가진 캐릭터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고안이고 재구성이고, 음유시인의 즉흥적인 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UI 차원에서 뇌의 생성물을 활용합니다.
우리가 활용하는 것은 고정적인 데이터베이스가 아닙니다. 우리는 뇌세포들의 유동적인 연결성 속에서 매 순간 새로이 싹트는 것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합니다.
인생이 가면 무도회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맨 얼굴을 드러낸 채 참석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 카프카
* 크리스 나이바우어, 『하마터면 깨달을 뻔』, 김윤종 역, 2017, 정신세계사
** 신경전달물질(도파민)의 과잉으로 (본래부터 ‘내’가 아닌 그) 목소리의 내용이 특히나 더 임의적이라 고 합니다.
*** 자기 의미론적 기억(Self-semantic memory)은 개인의 경험과 관련된 일반적인 지식, 즉 자신에 대한 의미론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자서전적 기억과 달리 구체적인 사건이나 맥락을 포함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이나 특성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예: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