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도대체 얼마가 있어야
서기 21XX년, 모두가 어김없이 분주히 생산과 소비를 통해 맹목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어나가던 어느날, 거대한 함대가 태양계 경계를 넘어 지구 궤도에 정렬했습니다. 그 모습은 공포스럽기보다는 압도적인 위엄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위협도,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온 인류를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습니다.
곧이어 전 세계 모든 통신망과 개인 디바이스에 동일한 영상 메시지가 송출되었습니다. 유려한 은색 우주복을 입은 한 존재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테라 거주자 여러분, 우리는 벨라리온 통합 공화국의 협상단입니다. 평화적 교류를 희망합니다만, 우선 저희의 권리 주장에 대해 알려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잠시의 정적 후, 이어진 메시지는 인류가 이제껏 쌓아온 모든 가치관을 산산이 부수기에 충분했습니다.
"선택 행성 '테라', 즉 귀 행성의 구매 절차가 완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지불은 우주 연합 규정 7항 3조에 의거, '시공간 균열 조정권' 3단위와 은하 표준 단위로 '암흑 물질 채굴 독점권' 253개를 통해, 전(前) 소유주에게 정당하게 이행되었습니다. 귀 행성은 이제 벨라리온 통합 공화국의 자산입니다."
지구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전 소유주'가 누구이며, 언제 지구를 팔아넘겼단 말인가요? 인류는 그 누구에게도 지구를 판 적이 없었습니다. 분노와 당혹감, 그리고 존재론적 위기감이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은빛의 존재는 마치 인류의 혼란을 예상이라도 한 듯,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테라는 은하계 내에서도 극히 드물게 발견되는 시공간 안정화 핵심 노드입니다. 극도로 안정된 중력 평탄성을 지닌 이 특이점은, 광자 동력원의 안정적인 고출력 제어뿐만 아니라, 시공간 왜곡을 통한 초장거리 이동 경로를 안정화하고, 광범위한 은하계 네트워크 내 주요 허브를 연결하는 항성간 통신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인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귀측 행성의 물리적, 생물학적 모든 구성 요소는 이 시공간 노드의 미세한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이는 연합의 은하계 전체 네트워크 유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저희는 공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 행성을 인수했습니다."
한 인류 대표가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는 이곳에서 진화하고, 문명을 이루고, 수천 년의 역사를 쌓았습니다! 우리 존재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당신들이라면 생명 그 자체의 존엄함과 존귀함을 존중해주시겠지요?" 외계 존재의 은색 눈동자에서 희미한 빛이 일었다. "생명, 즉 바이오-팩터들은 테라의 주요 구매 항목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행성의 핵심 가치는 물리적 특성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불필요한 혼란을 지양합니다. 귀측 생명체들의 존재는... 일종의 “덤”으로 간주될 수 있겠습니다. 저희의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기본적인 생존 환경은 유지될 것입니다. 인위적 멸종을 강요할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현 시간부로, 지금껏 당신들이 이어왔던 무분별하고 야만적인 지구 개발은 중단해주셔야겠습니다.“ ”저희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정당히 지구의 값을 지불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희미한 빛을 발하던 외계 존재의 은색 눈동자가 잠시 인류 대표를 주시했습니다. 정적 속에서 그들의 차분하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다시 울렸습니다. "지구 거주자여, 귀측의 제안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지불'에 대한 귀측의 개념은 저희 연합의 표준 계약 절차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은색 몸체를 약간 갸우뚱 움직이며, 인류 대표를 꿰뚫듯이 주시 했습니다.
"첫째, 이미 언급했듯이 '테라'의 지불은 완료되었습니다. 연합의 계약 시스템은 거래의 이중성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저희의 지불 방식은 귀측이 이해하는 '자본'의 형태를 훨씬 넘어선 개념으로, 이미 '전 소유주'와 합의된 방식으로 처리되었음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합니다. 따라서 귀측의 재지불 의사는 무의미합니다."
"둘째, 저희는 이미 귀 행성의 가치를 면밀히 분석하고 구매 절차를 수행했습니다. 귀측이 주장하는 '정당한 값'을 재산정하고 그것을 지불할 수 있도록 기다려 달라는 요청은, 저희의 자원 운용 계획에 불필요한 지연을 초래할 뿐입니다. 저희의 시간 개념은 귀측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 효율의 차이 또한 극심합니다. 당신들이 얼마나 빠르게 지구를 일구어가든, 우주 제국의 규모의 복리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대들은 테라 행성의 덕을 보아 여기까지 진화해왔다지만, 동시에, 당신들이 너무나도 뒤처진 존재라는 점에서 유감을 표합니다. 이 행성의 가치는, 당신들의 자본 규모에 비해 턱없이 높습니다."
'덤'. 인류는 한평생 자본을 쫓아, 부의 축적과 소유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정작 자신들의 존재는 구매한 행성에 딸려오는 '덤'에 불과하다는 선언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평생 온몸을 던져 쌓아올린 자본의 성은 무의미한 모래성이 되었고, 인류의 가치는 외계 문명의 차가운 계산 아래 0에 수렴했습니다. 외계 함선들에서는 조용히 건설 모듈들이 분리되어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행성의 특정 지역에 거대한 시설들을 짓기 시작했고, 인류는 철거되어가는 피라미드와 백악관, 자유의 여신상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이 지구 행성의 이방인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구는 이제 소유주가 바뀌었고, 인류는 '세 들어 사는' 덤으로 전락했습니다. 자본을 향한 끝없는 질주 끝에, 인류가 마주한 것은 우주적 규모의 계약서와, 그 계약서 한구석에 작은 글씨로 쓰인 '생명체(덤)'이라는 차가운 문구였습니다. 이제 인류는 무엇을 위해,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가야 할까요? 그 질문만이 허공에 맴도는 가운데, 지구는 새로운 주인의 이름으로, 조용히, 재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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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가 있어야 지구를 살 수 있을까?
어느 정도의 힘이 있어야 그대들의 무분별한 질주를 멈출 수 있을까. 왜 늑대의 자유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낯설어하며 양들은 힘 없이 죽어가야 하는가.
아무리 모두가 분주히 자본주의를 굴리든, 자본주의에 의해 굴려지든, 당신은 지구를 살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저 지구 위에서 조용히, 잠깐을 살다 갈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