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만 특별해

by 밈바이러스
레비나스의 통찰은 이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실제로 내 손으로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 타자를 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면 여기에 있었을 수도 있는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다. 나의 생존은 타자의 생존가능성을 빼앗는 것, 죽이는 것이다. ‘존재=코나투스=생존’으로 이어지는 이 존재론의 회로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정의로운 것인가?” 레비나스는 묻는다. “어떻게 타자를 살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가?”
- <서바이벌리즘 모더니티>, 김홍중



유전자는 자신을 실어 나르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신경쓰고, 돌보도록 합니다. 나 자신을 제쳐 놓으면서까지 옆 친구를 우선해서 돌보는 유전자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내 몸과 바깥의 경계선을 알게 되었고, 그 경계를 중요히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달리 특별하다는 생각이 기본이 됩니다.


우리는 1인칭의 관점을 갖습니다. 특정 관점을 갖게 되면, 편파성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생각은 자신의 몸과 유전자라는 집단의 대표로서 많은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특정 집단에 속하게 되면, 자신의 집단인 내집단(우리)과 우리 밖의 집단인 외집단(저들)에 대한 판단 기준도 너무나 달라집니다.

실제로 ‘사랑 호르몬’, ‘유대감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옥시토신은 외집단 구성원에 대한 불신, 경계심, 심지어 공격성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내집단의 안전과 안녕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기제의 일환으로, 외집단을 위협으로 인식하고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피엔스 종은 사교성과 동시에 외집단에 대한 집요한 공격성을 갖추어 진화한 종이라고도 합니다.)




본질적인 것은 없다. 상황적 맥락의 힘

우리는 특정 사람에게 특정한 ‘본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을 알면 빠른 판단이 가능하고, 나머지 세부 사항은 무시해도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보통 길에 엎어진 사람이 있으면 돕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움을 무시하고 급한 채 걸어가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은 내적인 ‘본질’보다 ‘상황적 맥락’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 있습니다. 1973년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에서는 예비 성직자들이 과연 어떤 상황에서 타인을 돕는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피험자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학생들이었습니다.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타인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어쩌면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피험자인 대학원생들에게 후배를 위한 설교를 부탁한 뒤, 설교를 하러 가는 길에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만나게 했습니다. 이때 핵심적인 조작은 ‘시간적 압박’이었습니다. 한 그룹에게는 ‘설교 시간에 늦었으니 서둘러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그룹에게는 ‘설교 시작까지 시간이 충분하다’고 말했거나, 시간적 압박을 주지 않았습니다. 실험 결과, 시간 압박으로 급했던 그룹에서는 단 10%의 학생들만이 쓰러진 사람을 도왔습니다. 반면, 일반 그룹에서는 63%의 학생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입니다. 타인을 돕는 것이 직업이자 소명인 신학대학원생들조차, ‘급하다’는 상황적 요인 하나 때문에 도움이 절실한 타인을 외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실험으로 ‘좋은 사람의 본질’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견고한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내적인 본질만 보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나쁘다’고 손가락질할 때, 사실은 그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본질주의를 내려놓고 상황과 맥락을 조금 더 참작해주는 마음을 낸다면, 세상은 더 너그럽고 따뜻한 곳이 될 겁니다. “에휴, 그 사람은 원래 그래”라고 쉽게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떤 상황이었을까?”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개체화하고 개체화하자

유니세프 등의 국제 구호단체에서 기부 금액을 최대한 많이 모으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생생히 살아 숨쉬는 고유의 이름을 가진 친구 ‘하나’의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도 말고 딱 하나. 그때 가장 많은 기부 금액이 모인다고 합니다. 이를 ‘식별 가능한 피해자 효과’라고 합니다. 수백만 명의 굶주리는 아이들의 통계보다 ‘철수’라는 이름의 한 아이가 겪는 고통을 실감 나게 보여줄 때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기부를 하는 현상입니다. 추상적인 숫자는 뇌에 잘 와닿지 않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감정을 움직입니다. 우리는 통계보다는 일화에 더 강하게 끌립니다.


인터넷에서 중국인 혐오를 하는 글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인 혐오는 ‘외집단 동질성 편향’ 현상과 연결됩니다(내 집단은 다양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집단은 다 똑같다고 치부해버리는 경향) 가령, 초등학교 한 반에 얼마나 다양한 아이가 있을까요? 그런데 3학년 2반 아이들이 ‘3반 애들은 다 문제가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꼴입니다. (3반 애들은 2반 애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혐오라는 감정은 익명성과 추상성 위에서 자라납니다. 혐오는 대상을 구체적인 개인이 아닌, 모호하고 거대한 집단으로 묶어버릴 때 강력해집니다.

중국인 ‘전체’를 묶어서 혐오하는 건 사실 굉장히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나와 별 다를 바 없는 동갑내기 친구’를 상상하는 순간, 그 거대한 혐오의 벽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 친구의 배경, 살아온 환경, 가치관을 생각하게 되면 ‘무지성 혐오’는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내가 그와 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 그의 문화와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면, 그와 다른 생각과 세계관을 갖고 살아갈 것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요?


‘개체화’는 익명성과 추상성의 장막을 걷어내고, 그 안에 있는 ‘나와 같은, 그리고 나와 같이 살아 숨 쉬는 한 존재’를 발견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개체화하고 개체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으로 흘러가는 약한 존재며, 서로에 애틋함을 느껴야 합니다. 적어도 미워하면 안됩니다. (마사 누스바움은 우리 사회의 기반이 되는 혐오와 수치심이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음은 게임에 나오는 두 캐릭터의 상호작용 대사입니다.

오로라 : 왜 치유하기를 포기하고 상처 입히는 것을 선택하죠?

요네 : 상처 주는 건, 치유하는 걸 훨씬 상회하는 무엇인가를 주기 때문이지.



샤덴프로이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남의 불행을 보았을 때 기쁨을 느끼는 심리’라는 뜻입니다. 특히 그 ‘남’이 내가 평소 싫어하던 사람이라면 그 기쁨이 배가 된다고 합니다. 로버트 새폴스키는 우리가 ‘올바른 맥락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전혀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제삼자 처벌에 관심을 갖고, 희열을 느끼는 유일한 종입니다. 제삼자 처벌에는 비용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가 한 단위의 돈을 포기함으로써, 저 나쁜 놈의 돈을 두 단위 빼앗기) 여기서, 그 비용을 들여서라도 내가 정의로운 영웅이 되는 것을 지원해주는 호르몬이 도파민입니다. 처벌에는 보상 중추가 관여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벌에는 범죄 예방 및 억제 효과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잔인해지면 안 되는 것이, 처벌의 강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편도체, 섬엽 등 완전히 ‘비이성적인’ 뇌가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 역겨움의 감정을 유발해서 집단을 가르고 선동하는 사람을 조심해야합니다. 역겨움은 우리가 아닌 ‘저들’을 사람이 아닌 ‘바퀴벌레’로 보도록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감정 이입이 사라집니다.)


이런저런 익명 커뮤니티, 사람을 벌레만도 못한 취급

정의를 마구 휘두르는 사람이, 내게는 악마처럼 보였어




‘다른 사람이 이기는 걸 좋아해 봐’와 자애명상

잠깐 자신의 1인칭 관점을 내려놓고, ‘나’라는 느낌을 내려놓고 어디에도 서지 않은 관점에서, 우주의 넓은 마음으로 나와 느낌, 사람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다시금 바라보면 어떨까요?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의 본질을 가르지 않고, 딱히 본질이라고 할 것 없이 별 하나하나, 먼지 하나하나로 총총한 우주. 그리고 그 연결성을 깊이 자각해 보는 것입니다.


자애명상은 자신과 타인의 행복, 평화,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훈련하는 명상법입니다. 불교에서 유래했지만, 종교적 배경 없이도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마음 훈련입니다. 자애명상의 핵심은 ‘자애심’을 계발하는 것인데, 자신을 향한 따뜻한 마음에서 시작하여 점차 사랑하는 사람, 친구들, 심지어 어색한 관계에 있거나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에게까지 확장하고, 나아가 모든 존재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보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기는 걸 좋아해 봐. 그럼, 아빠도 행복할 걸?” 침착맨의 딸, 쏘영이의 말이 자애명상의 핵심을 놀랍도록 간결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타인의 행복과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기뻐할 때, 그 긍정적인 에너지가 결국 자신에게도 돌아와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자신의 관점을 내려놓고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자애명상의 궁극적인 목표와 일치합니다. 타인의 성공에 질투나 시기 대신 기쁨을 느낄 때, 우리 마음은 평온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선과 악, 생과 사를 함께 품은 복잡한 존재입니다. 모두가 제각기 특별하다고 해서 결코 개개인의 소중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불행에 “왜 하필 나야?”라고 한탄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행운에 대해서도 “왜 하필 나야?”하고 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 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인간의 품격은 바지에 똥 지리지 않음에서 온다.

우리는 급똥 경험 앞에서 모두 하나가 된다.

내 안에 있는 그분하고 네 안에 있는 그분하고

같다고 생각하기. 우리는 모두 형제다.


질투는 자신보다 생식 적합도가 높은 개체에게 느끼는 뿌리 깊은 감정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걸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지상에 귀머거리, 장님, 정신병자가 존재하는데 어떻게 이상을 품을 수 있는가? 어떻게 내가 다른 누군가가 볼 수 없는 빛을 즐길 수 있으며 어떻게 다른 누군가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즐길 수 있겠는가? 나는 모두의 어둠에 책임을 느끼며 빛을 훔친 도둑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빛을 빼앗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소리를 빼앗지 않았는가? 정신병자의 어두운 정신에 대해 우리의 맑은 정신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닌가? 그러한 일들을 생각하면 왜인지 모르지만 나는 용기와 의욕을 완전히 잃는다. 생각이란 쓸데없고 동정이란 헛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불행이든 나는 그것을 동정할 만큼 정상적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동정이란 표피적인 것이다. 운명이 꺾이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하면 울부짖거나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동정이나 연민은 소용도 없을 뿐 아니라 모욕적이다. 게다가 자신이 끝없이 고통스러운 마당에 어떻게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할 수 있는가? 동정심에는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흔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다.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당한 것이다.

- 에밀 시오랑, 동정심의 오만함,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23화8. 진화심리, 인간이 처한 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