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태어났음의 기쁨과 슬픔

by 밈바이러스
창조주여, 저를 흙으로 빚어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제가 요청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내 달라고 제가 애원이라도 했습니까?
- 존 밀턴, <실낙원>



내가 ‘나’로 태어날 확률

친구의 ‘북한에서 안 태어났으니 한잔 해’라는 카톡을 보고 들었던 생각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날 확률은 한국 인구 / 세계 인구로 측정해서는 안 됩니다. 대기 번호를 뽑고 추첨을 기다리던 영혼이 태아의 발생과 동시에 육체에 쏙 들어가는 것이 아니며, 한국의 한 장소에서 체내 수정 및 발생이 일어나고 신경학적 발달 과정을 통해 생겨난 내 뇌와 몸이 가진 구조 속에서, 자기발생적 힘으로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자의식이 일어나고 굳어지는 것은 더 나중의 일입니다.) 내 의식의 자리를 놓고 의식적인 쟁탈전이 있던 것도 아니고, (정자에게 마음을 부여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그렇습니다.) 다른 생물로 태어날 확률이나 먼지 속에서 무로 머물렀을 다른 가능성과 확률과도 별개입니다.


내가 나로 태어난 것에 기쁨을 느끼며, 수많은 우주적 기적에 경이를 느끼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그런 식의 계산은 사후적인 자랑에 불과합니다. 로또 당첨자들의 마을에서 로또 당첨을 자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우주는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 역시 인간으로서의 경험은 제법 즐거울 때가 꽤 많습니다. 모두 수많은 당신 덕분입니다.)


별일이 없다면, 적정한 행복감과 쾌적함을 느끼도록 진화된 사람에게 (인간은 행복 오뚜기라 장기적으로 평균 행복 점수는 7점) 태어나지 않았음 상태와 삶의 기쁨을 비교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에게 무조건 유리한 토론인데, 태어나지 않은 친구에겐 발언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토론 상대,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부정적 스탠스를 가진 밈과 그 소유자는 성공하기가 힘듭니다. 토머스 리고티의 책 <인간 종에 대한 음모>를 보면, 세상 어떤 사람들은 마치 삶이 고통이며, 살아갈 가치 따위 없다는 걸 설파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슬프게도 대부분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인류 원리와 생존자 편향

약한 인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주가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음에 놀라지 마라.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주의 물리 상수나 초기 조건이 우리 존재에 적합하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이 우주가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임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내가 태어나고 ‘내’가 발생해서 이 세상을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으므로 이 세상이 ‘나’라는 현상을 지원한다는 말도 안 되는 확률에 놀라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주와 자신의 존재에 경이를 표할 자유가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친구에겐 발언권이 없으며”, “사후적인 자랑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생존 편향’ 또는 ‘사후 확증 편향’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음’의 상태를 제대로 경험하거나 평가할 수 없습니다. ‘태어난 것’이 얼마나 대단한 확률적 사건인지를 사후적으로 계산하고 자랑하는 것은, 생존자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며 객관적인 진술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이 절대 할 수 없는 것, 영원히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는 것은 ‘태어나지 않기’입니다. 태어난 것이 모든 것의 전제입니다.




창조에 대한 책임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피조물은 과학 기술을 통해 인위적으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그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죠. 이렇게 인위적으로 태어난 생명뿐만 아니라, 의식(conscious)을 창조하는 의식(ritual)을 생각하고 있는 부모는 엄청난 신중을 기해야할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불편한 과학적 진실들이 늘어나며, 병리적 사회문화의 독주를 막아 세우기 어려운 세상이라면 더더욱이요.

태어난 아이에게는 태어날지 말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어떤 환경과 사회 문화 속에서 자라나고 성장할지를 포함한 어떤 종류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치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애를 안 낳으려고 한다’라는 의견대로라면, ‘아이가 태어나고 싶을 수도 있기 때문에 애를 낳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어디 숨 막히는 곳에 갇혀 있는 불쌍하고 가련한 영혼을 “아빠(엄마)가 용기 있게 구해주는 것보다 경험을 구성하지 못하고 자동 반사 운동을 할 뿐인 태아로부터 신경계가 단계적으로 발달하면서 자아가 차차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낳지 않은 아이가, 수정되지 않아서 존재하지 않는 아이가 ‘나는 태어나서 수많은 행복을 경험하고 싶으니까 얼렁 낳아줘요.’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고통받고 느끼며 행복할 수 있는 자는 언제라도 이미 태어나버린 아이입니다.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고, 그에게 고통을 줄 수도 없습니다.


“삶은 고통이니 우리는 모두 반출생주의를 해야 해!”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면서, “으이그, 불쌍하고 딱한 것, 태어났음의 기쁨을 모르다니!” 이럴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해줘야 합니다. 각자 상황과 입장이 다릅니다. 반출생주의는 장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밈이며, 지금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언젠가는 헐벗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모든 것은 오로지 부모의 선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영혼 중 하나를 골라 지상으로 입양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생식 세포를 통해 나의 유전자 조성 50%를 물려받아 자라나며, 자아가 싹트게 되는 아이를 사랑하고 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출생주의자는 삶에 의미가 없으며 모두가 당장 자살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막아 고통을 줄이려는 철학이지, 이미 존재하는 생명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반출생을 통해 추가적인 고통을 막음과 동시에 지금 이미 여기에 존재하는 충분한 (80억) 영혼을 더 우선시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그 누구보다 인류를 애정하는 반출생주의자가 제법 많을지도 모릅니다.




친출생 편향은 진화적 기원에 그 뿌리를 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이 우월하다는 징표로 간단히 생각하기도 한다. 친출생 편향은 많은 방식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보며, 불임이 아니라면 아이를 낳지 않는 건 퇴행적(backward)이거나 이기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언제 아이를 갖지 않아야 할지를 알고 이 앎에 따라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성숙의 징표이지, 미성숙의 징표가 아니다.

-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데이비드 베네타.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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