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마블

초단편, 정치 사회적 디스토피아 SF

by 밈바이러스

옆에 앉은 친구 녀석이 희희덕거리며 주사위 두 알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툭 떨어진 정육면체의 플라스틱 조각이 오늘따라 유독 차갑고 묵직하다. 지금 내 처지는 '사면초가'라는 고사성어로도 부족하다. 주사위 눈이 2에서 12 중 어떤 숫자가 나오든, 결과 값은 이미 ‘파멸’로 수렴하고 있으니까. 알록달록한 보드판 위, 수많은 세상이 펼쳐져 있지만 그 화려한 도시들 중 내 이름 석 자 적힌 땅 한 칸이 없다.


친구 녀석들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한 놈은 11을, 다른 한 놈은 7을 간절히 빌고 있다. 그 숫자가 나오면 내가 딛게 될 땅의 주인들이다. 이미 거덜 난 내 주머니에서 마지막 남은 단 한 푼까지 기어이 골수까지 짜내겠다는, 그 지독하고도 투명한 탐욕. 그들에게 나는 친구가 아니라, 그저 통행료를 상납할 움직이는 현금 인출기에 불과했다. 내 전 재산은 판을 한 바퀴 돌 때마다 복지 차원으로 주어지는 기본 소득 20만 원이 전부인 것을.


탁, 토도독.

자살이라는 퇴로조차 막혀버린 이 지독한 룰 위에서 나는 유일한 생존 수를 계산했고, 주사위는 내 간절함에 응답하듯 판 위를 톡톡 소리 내며 튕겨 올랐다. 내가 멈춰 선 곳은 기적처럼 ‘세계 여행’ 칸이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내가 예약한 목적지는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감옥으로 보내줘.”

희희덕거리던 녀석들의 입술이 보기 좋게 일자로 굳어졌다. 11을 바랐던 녀석은 자기 땅인 '서울'에 빌딩을 올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혀를 찼고, 7을 기다리던 녀석은 내 마지막 쌈짓돈을 털어내지 못한 게 분한지 내 손에서 주사위를 가로채 갔다.

"야, 너 미쳤냐? 거기 가면 세 턴 동안 아무것도 못 해." 녀석이 짐짓 충고하는 척 내뱉었지만, 나는 대답 대신 낡은 말(馬)을 집어 들어 보드판 구석, 창살이 그려진 좁은 칸에 단단히 박아 넣었다.


"아니,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거지."

내 말에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건 더 이상 종이판 위에서 벌어지는 숫자의 유희가 아니었다. 창밖으로는 보증금마저 까먹고 있는 내 고시원 방보다 더 어두운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보드판 위에서는 한 칸만 움직여도 통행료니, 세금이니 하며 내 목을 죄어오지만, 이 사각형의 감옥 안에서만큼은 누구도 나에게 돈을 요구할 수 없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내 파멸을 기다리던 '친구'라는 이름의 채권자들도 창살 너머에서는 그저 구경꾼일 뿐이다. 나는 등받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처음으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자, 이제 너희끼리 치고받고 싸워봐. 난 여기서 좀 쉴 테니까."


나에게 필요한 건 화려한 비행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될 수 있는 합법적인 구속이었다. 녀석들이 다시 주사위를 굴리기 시작했다. 짤랑거리는 주사위 소리가 마치 내 목을 조르던 수갑이 풀려나가는 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려왔다.


'부디, 곧바로 더블(같은 숫자 눈이 나오는 것)로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는 불상사가 없기를.'
그 문장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밤하늘의 어둠 속에서 저 혼자 쓸쓸히 떨고 있는 나의 간절한 울먹임이었다.

이 작은 바람마저 어긋난다면, 내게 허락된 마지막 숨통마저 끊겨버릴 테니까.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감옥이라는 안전지대에서 희망도, 두려움도 모두 내려놓은 채, 잠시나마 이 불공평한 게임판 밖으로 빠져나온 셈이었다.

주사위가 다시 굴러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것은 누군가의 승리를 알리는 울부짖음이 아닌, 단지 또 다른 불확실성을 예고하는 소리였다.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고, 나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완전한 평등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감옥에 들어앉아 숨을 고르는 동안, 밖의 세상—그러니까 이 낡은 테이블 위—은 더 처절하게 변해갔다. 나라는 공통의 먹잇감을 잃어버린 하이에나들은 이제 서로의 목덜미를 노리기 시작했다.

"야, 통행료 200만 원. 내놔." "올림픽으로 통행료 2배다. 이 짜시야~."

녀석들이 고함을 지르며 지폐 뭉치를 주고받는 소리가 감옥 문밖의 소음처럼 멀게 느껴졌다. 보드판 위에서 나는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내 칸에 들어올 수 없고, 나 또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무해(無害)한 존재가 되어 창살 안에서 지켜보는 바깥세상은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평화는 늘 유통기한이 짧은 법이다. 카드를 뒤집던 한 녀석의 손끝이 멈췄다. 녀석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뒤틀리더니, 곧 섬뜩한 안광을 내뿜으며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녀석이 탁자 위에 내던진 것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초대장’이었다.

[카드 내용: ‘황금빛 초대장 - 상대방을 즉시 당신의 가장 비싼 땅으로 소환합니다.’]

그것은 교수대로 향하는 강제 소환장이었다. 녀석들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다시 이 지옥 같은 게임판 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나의 안식처였던 창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녀석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내 말을 집어 들었다. 그가 지목한 곳은 보드판의 한복판, 가장 화려한 금박이 입혀진 땅 ‘미국’이었다.

“웰컴 투 뉴욕. 이제 네 영혼까지 저당 잡힐 시간이야.”

내 낡은 말이 녀석의 아득한 빌딩 숲 위로 사뿐히 내려앉으려던 그 찰나였다. 적막하던 고시원 방 안, 우리 모두의 핸드폰에서 찢어지는 듯한 긴급 재난보도 알람이 울려 퍼졌다.

[속보: 미 본토 핵 테러 발생… 워싱턴 및 뉴욕 초토화]

화면 속은 지옥이었다. 일찍이 미국의 원수가 똥통 국가(Shithole countries)라 비하하며 외면했던 먼 이국의 땅에서 날아온 응분의 불꽃이, 세계의 심장부를 거대한 버섯구름 아래 묻어버리고 있었다.

“저게… 뭐야?”

녀석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방금까지 녀석이 자랑스럽게 내보이던 ‘미국’ 소유권 증서는 이제 현실의 먼지와 함께 불타 없어질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녀석들이 세운 빌딩, 그들이 갈취한 통행료, 그리고 그들이 맹신했던 자본의 견고한 성벽이 실시간으로 기화(氣化)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고마워. 나를 가장 비싼 땅으로 초대해줘서.”

나는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는 녀석들을 향해 차갑게 읊조렸다.

“그런데 어쩌지? 이제 그 땅, 임대료를 받을 주인도, 돈을 낼 손님도 없는 재더미가 됐는데.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아서 거스름돈을 거슬러 줄 손가락조차 안 남았을걸.”

현실의 핵폭탄은 보드판의 룰마저 증발시켰다. 녀석들이 가진 수조 원의 사이버 머니는 전산 마비와 함께 0이 되었고, 한 칸이라도 더 가지려 발악하던 탐욕은 생존을 향한 처절한 공포로 치환되었다.

보드판 위로 붉은 석양빛이 스며들었다. 아니, 그것은 폭발의 여운이 하늘을 적신 핏빛이었다. 나는 내 말을 집어 들어, 이제는 검게 타버린 뉴욕 칸 위에 조용히 눕혔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고 했잖아.”




부루마블은 가족을 찢어놓는 무자비한 게임이다. 주사위를 굴리고는 탐욕스러운 지주에게 엄청난 임대료를 뜯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진해야 하는 일보다 짜증나는 것은 없다. 보드 게임이 가족을 분열시키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사회를 분열시킨다. 매번 플레이할 때마다 조건이 초기화되는 보드 게임과 달리 이런 불평등은 세대에 걸쳐 지속되며 더 커진다. 지난번 게임을 중단한 지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부루마블이 얼마나 끔찍한지 상상해 보라.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현실에서는 게임이 초기화되지 않는다. 세대를 뛰어넘는 지속성이라는 이 핵심 문제는 부루마블의 한 바퀴를 돌 때마다 기본 소득을 지급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부루마블은 사실 우리가 논의해 온 무절제한 자본주의의 역학 관계가 얼마나 불공정한지 알려 주려고 고안된 게임이다. 단순히 재미있는 게임을 넘어 견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소수에 의한 지속적 지배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도구이다. 이 게임의 원조는 '지주 게임'으로, 불공정의 논리를 전달하는 색다른 방법을 고안하는 것으로 유명한 활동가 리지 매기(Lizzie Magie)가 설계했다.

- <인간 문명의 네 가지 법칙>, 마이클 무투크리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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