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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론자 Aug 15. 2021

격차 줄이기

SF, 가상현실, 이야기

허무의 시대가 지나 체념의 시대가 도래했다. 4차 산업혁명이 세계에 몰고 온 폭풍과 혼돈에 휩쓸린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맞는 삶의 방식에 안주하고 체념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해버렸다. 이제는 사회 계층이 완전히 고착화되었다. 역전의 수단은 거의 멸종한 듯싶었다. 한편 신기술은, 신격화된 인공지능 팀, 열 손가락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렸으며, 세계의 시민들은 그 기술을 언제 접할 수 있느냐에 따라 5계급으로 구분되었다.


1그룹. 과거의 것은 끝없이 새로운 것으로 갈아치울 수 있는 재력을 가진 그룹

2그룹. 기술의 교체주기는 느려도, 여유 있게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는 그룹

3그룹. 1~2년 내로 늦게나마 신기술을 접할 수 있는 그룹

4그룹. 5년은 기다려야 하는 그룹

5그룹. 영원히 과거에 사는 사람들


민수는 직업이 없어 기본소득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아버지와 실버 등급 콘텐츠 제작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3그룹과 4그룹 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위 등급 창작자들의 위기의 날이 찾아왔는데, 상위 등급의 창작자들이 인공지능 툴로 대량으로 찍어낸 콘텐츠들이 콘텐츠 시장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매달 콘텐츠 시장 플랫폼에 무지막지한 금액을 내고 다이아 등급의 자격을 취득한 그들이 게시하는 콘텐츠는 플랫폼의 위에 고정적으로 배치되어 이목을 끌기가 너무 쉬웠다. 게다가 인공지능 툴이 빅데이터를 이용해 사람들이 어느 것에 열광하는지 정확히 잘 집어냈기 때문에 민수 엄마의 콘텐츠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민수 엄마는 처음에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민수 엄마가 몇 달간 밤샘을 해가며 심혈을 기울인 콘텐츠가, 다이아 등급의 콘텐츠 제작자가 3초 만에 생성해버린 콘텐츠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절망적이었다. 


민수 엄마는 시름시름 앓더니, 하루 종일 여러 기기를 붙들어 매고 광고를 클릭하여 잔푼깨나 벌어야 하는 아줌마로 전락해버렸다. 하루 아침에 말이다.

민수가 유치원에 입학하고, 만화에 재미를 붙였을 때, 유명하고 재밌는 만화책은 출간 후 즉시 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했다.

민수는 세상에 산타클로스 따위는 없다는 것을 고작 5살 때 깨달아버렸다. 민수는 매직천자문 3권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원했다. 허나, 매직천자문이 워낙 히트였기 때문에 출시된 지 1년이 지났음에도 그 가격이 백만 원에 육박했다.

새로운 것이 출시된 후 지나간 시간과 그 상품의 가격이 완전한 반비례 그래프를 그리는 시대. 그리고 민수 가족에게 떨어지는 기본소득은 달에 200만 원 남짓. 고작 만화책 한 권에 백만 원을 태울 수는 없었다. 민수가 그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 본 만화책은 수학루팡 10권. 마찬가지로 히트 만화책이나, 5년의 세월이 지났기에 만원의 가격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교육도 불평등한 시기였다. 최신의 교육과정과 교육자료를 받아보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했다. 민수는 구닥다리 교재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낼 뻔했으나, 운이 좋았다. 민수의 할아버지의 옛 친구 중, 열 손가락 기업의 관계자가 있던 것이다. 민수에게 어떻게든 제대로 된, 신세대의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서, 민수 할아버지는 굽신거림을 마다하지 않았다. 옛 친구를 찾아, 빌고 또 빌며, 민수의 교육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민수가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말이다. 기술의 발전은 빨랐으나, 그럴싸한 가상현실의 완성에는 예상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

가상현실 버전 1이 출시되었다. 하지만 완성도가 많이 떨어진 탓인지 버전 1은 모두에게 외면받았다. 그러다가 버전 1의 가격이 충분히 가라앉았을 때, 5그룹의 인간에게 닿았다. 아무리 봐도 뭔가 부족했지만, 5그룹의 시민들에게는 현실보다야 나았다. 그래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상현실 내에서 보냈다.

민수가 대학생이 되었고, 버전 2가 출시되었다.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모든 면에서 버전 1에 비해 꽤나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시간은 흘렀고, 버전 2는 4그룹의 시민들의 것이 되었다. 민수의 부모님도 버전 2의 가상현실세계에 흠뻑 빠졌다.  

민수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버전 3이 출시됐다. 버전 3의 가상현실 역시, 완벽이라고 부르기에는 퍼즐 조각 몇 개가 부족했다. 하지만 풍부한 콘텐츠에, 3그룹 시민들은 엄청난 열광을 보였다.

긴긴 시간이 지났다. 민수는 실력을 인정받고 열 손가락 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실력파 엘리트, 민수는 열 손가락의 가상현실 개발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민수의 팀은 부족한 조각을 하나둘씩 채워나가게 되었고, 버전 4를 출시했다. 버전 4는 2그룹의 시민들에게 성공, 성공, 대성공이었다.

개발의 속도가 점차 가속화되었다. 버전 5는 버전 4가 나오고, 불과 1년 내에 완성이 되었다. 버전 5쯤의 완성도라면, 당분간은 1그룹의 사람들만이 이용할  있을 것이다.

그렇게
5그룹의 시민이 버전 1을
4그룹의 시민이 버전 2를
3그룹의 시민이 버전 3을
2그룹의 시민이 버전 4를
1그룹의 시민이 버전 5를
이용하게 된 순간은 동시였다. 가격이 충분히 낮아져 하위 그룹의 사람들이 하위 버전을 이용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고, 새로운 버전의 개발에도 그 격차만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인이 가상현실에서 살게 되었다. 민수는 버전 5에서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하나의 가능성도 놓치지 않고, 이것이 진짜다, 모든 것이다, 할 수 있는 버전 6의 개발에 성공했고. 0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열 손가락 기업 관계자에게 권했다. 그들은 매우 놀라워했다. 정말 완전무결, 생생, 실감나는 가상세계였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결정나버린 것이 아닌가를 줄곧 생각해왔던 민수는, 마음에 평등의 추구라는 불씨를 계속 뿜어왔다. 그리고 그 불씨는 완전히 점화됐다.


민수는 자신만을 위해 후속적으로 개발한 버전 7의 기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단 한 줄의 코드를 실행했다. 이로써, 민수는 모두에게 평등한 세계를 선물했다. 사실 사람들은 가상현실에서도 평등할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뇌에 치명적인 수준의 전류가 발생했다. 죽음 이후의 세계만이 공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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