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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론자 Dec 08. 2020

시간왜곡병

수능

1.
전화벨이 울렸다. 민수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약이 완성되었단다. 민수에게
 약을 먹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민수는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유전병을 앓고 있다. 병명은 시간 왜곡병. 스스로는 체감하기 쉽지 않지만 보통의 사람들보다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느낀다. 쉽게 말해, 남들의 하루가 24시간이면, 민수의 하루는 16시간인 느낌이다. 그러니 민수는 항상 느렸다. 일례로, 민수의 50m 달리기는 11초 대이다.

2.
곧, 고3이 되는 민수에게 이 병은 치명적이었다. 공부할 시간도, 시험시간도 부족했다. 나름 자신의 생체시계에 적응했다 한들, 이는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 된다. 특히 시험에서. 아무튼 민수는 세계 최초로 치료제를 먹을 기회를 얻게 됐다. 민수 엄마가 열심히 발품을 판 덕택이었다.

민수 엄마는 차를 끌고 가 약을 한 병 구해왔고, 그날 밤 민수는, 한 달에 한 번 한 정이 권장복 용량인 알약을 한 정 복용하고 잠들었다. 다음날 민수는 학교에 갔다. 변화를 체감해볼 시간이었다.

3.
약의 효과는 아주 탁월했다. 민수는 자신의 몸이 괜스레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고, 남들과 똑같은 시간 체제 속에 살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실제로 민수의 인생은 약을 복용한 뒤, 완전히 달라졌다. 항상 달리기 꼴찌를 면치 못하던 아이가 학급 대표 계주로 뛰게 됐고, 금세 찾아온 고2 2학기 기말고사에서 시간 부족 없이, 꽤 괜찮은 점수를 받았다. 친구들도 달라진 민수를 좋아했고, 민수가 생각해도 자신은 전보다 모든 면에서 나아져 있었다. 민수는 그의 앞에 밝은 미래만이 놓여있을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약 개발자와 엄마가 너무나 고마웠다.

4.
겨울방학이 왔고, 민수는 수능 대비 겨울특강 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금세 고3 3월 모의고사를 보게 됐고, 민수는 전 과목 1등급을 받았다. 민수 엄마는 민수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과할 수도 있지만, 민수 엄마는 서울대 의대를 가슴에 품었다. 처음에는 민수를 격려하며 '조금만 더 열심히 해보자' 정도의 선에서 멈췄던 엄마였지만, 민수가 6월 모의평가에서 성적이 오히려 떨어지자, 엄마의 태도는 역변했다. 민수를 다그치고, 윽박지르고, 급기야 민수의 하루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민수의 우울감이 늘었으나 자신을 위해 약을 구해준 엄마이니 꾹 참고 엄마의 뜻에 따라 공부량을 극한까지 치올렸다.

5.
9월 모의평가. 민수는 전국 1000등 안에 들었다. 눈부신 비약이었다. 민수는 기뻤고, 어머니도 기뻐하리라 싶어 자랑스럽게 그 결과를 전했다. 그러나 민수 엄마는 만족하지 못했다. 민수 엄마는 약의 권장 복용량을 무시하고, 과다 투여를 시도했다. 갈색 알약이 아이스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민수는 수학 문제를 풀다가, 갈증이 나서, 그것을 단숨에 벌컥 들이켰다. 민수의 심장이 묘하게 쿵쾅댔으나, 민수는 피로 탓일 거라 짐작하고 가볍게 넘겼다.

6.
민수가 다음 날 사설 모의고사를 푸는데, 시간이 이상 할치만큼 많이 남았다. 평소에도 시간은 남았지만 이번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약이 문젠가 싶었지만, 차마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한편, 시간이 남으니 검토에 여유가 생겼고, 오답률은 줄었다. 그저 흡족한 민수 엄마는 알게 모르게, 약 투여량을 늘려갔다. 그렇게 민수의 하루는 거의 48시간이 되었다. 민수는 그제야 엄마에게 이상증세를 호소했다. 영어 듣기가 너무 느리게 들려, 알아먹기 힘들 정도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민수 엄마는 나는 모르쇠였다.

0.5배속의 곤혹한 듣기 평가에 적응해야 하는 난관은 오롯이 민수의 몫이었다.

7.
수능날, 시험을 무사히 끝마친 민수에게서 민수 엄마는 가채점표를 낚아채갔다. 영어 듣기 평가에서 몇 문제 틀린 것을 제하고는 만점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민수 모자에게 가히 충격적인 뉴스가 전파됐다. 가채점 만점자가 백 명도 더 넘는다는 뉴스. 난이도에는 분명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민수가 먹어온 약이, 시간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고, 아는 사람들은 다 알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던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영어에서 89점을 받아, 2등급을 받게 된 민수는 서울대 의대를 가지 못하게 됐다.

8.
사실 그 약은 치료제라기보다는, 바이오리듬을 빠르게 하는 각성제에 가까웠다. 과다복용 시 생체 시간과 뇌의 정보처리시간에 부조화를 일으켜 복용자에게 우울감과 스트레스를, 심할 경우 환각증세와 정신병을 초래하며, 중독성까지 있어 마약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각성제.

9.
간신히 약을 끊어내고 시간을 꽤나 흘려보냈음에도, 약물치료나 정신과 치료 등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취해보아도 그가 약을 먹기 이전의 시간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수는 치료를 거부했다. 복원력을 넘어선 스프링. 그것이 현재의 민수였다. 자유를 얻긴 했어도 수능이라는 단편적인 목표가 사라진 그에게 하루 72시간은 너무나도 길었다. 민수는 선택했다.

0.
자살이라고 불리는 탈출구를.


대학교 1학년 교양과목, 창의적 글쓰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라고 시작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과제와, 핑계대기 좋아하는 내가 평소에 생각해뒀던 핑계, "나의 시간은 너무 빠르게 가"가 만나 써 본 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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