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론자 Mar 31. 2022

바람과 나그네

자작 동화

게으른 나그네가 큰맘 먹고 여행길에 나섰다. 모처럼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바람이 정면에서 거세게 불어왔다. 조금 버거웠던 나그네는 왼쪽으로 1도 가량 틀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는 편이 훨씬 걸어갈만했다. 다음날 역시 바람이 나그네를 막아섰는데, 나그네는 이번에도 왼쪽으로 1도 꺾은 뒤 계속해서 걸어갔다.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왼쪽으로 1도 수정해서 걸어 나가기를 수없이 반복한 어느 날 나그네는 자신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방향과 90도 틀어져서 걷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나침반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나그네는 나침반을 보따리 깊은 곳에 넣어버리고는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혹은 떠올리려 하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쉼 없이 걸었다.

그 이후로도 나그네는 풍파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도 알게 모르게 계속해서 조금씩 왼쪽으로 1도씩 수정해서 걸어갔다. 나그네는 조금씩 더 발걸음이 빨라짐을 느꼈는데 이번에는 웬걸, 바람이 그의 등을 밀어주는 방향으로 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때다 싶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발이 너무 가벼워서 춤추듯 미끄러질 수도 있었다. 나그네는 오랜만에 마을을 하나 발견하였는데.
오랜만에 사람을 보아서 반가웠던 그는 어느새 쭈그렁 늙어버린 어머니를 발견하고 좌절 속에 눈물 흘린다. 그가 몇 년 전에 꿈 찾아 희망 찾아 출발했던 그 마을이었다.

바람이 주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조금씩 방향을 틀었던 그는 인생의 어느 순간 정체되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아예 퇴보의 길을 걸었다. 조금이라도 스트레스가 적은 길을 선택하던 나그네는 나다. 나침반이 그가 그의 목적지와 90도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줬을 때, 나침반의 조언을 외면하지 않고 그때서부터라도 다시 오른쪽으로 1도씩 수정해서 정면을 향해 나아갔다면 좋았을 것을... 나그네도 머리로는 알았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노루 후루야 "낮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