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한계구나. 남자는 생각했다. 세상과는 정을 뗀 지 오래였고, 이젠 가진 돈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요근래 자신이 세상에 어떠한 가치도 창출할 수 없을 거라고 느끼며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좋은 일 없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는 고심해본 결과 정신은 피폐해졌지만 몸만큼은 아직 건강하다는 자부심 하에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자신과는 달리,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겠다고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이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꿈 있고 앞날이 창창한 아이들에게 자신 안의 내용물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생각이었다. 그의 심장은 정열적으로 쿵쾅일 것이고, 그의 각막은 눈부신 미래를 투사하겠지.
나름 훌륭한 생각이었다. 다만 남자는 세상의 흐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국제 보건 기구 하에 인공 장기 공장이 잘 운영되는 시대였다. 인공 장기는 개인별 DNA에 맞춤형으로 찍어낼 수 있었고, 수술의 안정성도 추후의 지속성도 기존의 장기 이식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기존의 장기 이식은 어느덧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다.
한마디로 세상은 남자의 장기 또한 별달리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남자가 죽으면 처치하기 곤란한 폐기물만 나오는 것이었다.
남자는 조금 알아본 결과, 자신이 정부가 시범 운용 중인 정책의 대상자이며,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열심히 자신을 증명하는 자기소개서 및 서류를 준비하고는, 정부로부터 5천만 원의 보조금을 타낼 수 있었다.
그는 모 고아원에 5천만 원을 전액 기부했으며, 이윽고 세상에서 종적을 감췄다.
생명공학의 비약적인 발달로 사람의 수명이 너무나도 길어진 세상. 사람이 도통 죽지 않으니 지구에는 사람이 넘쳐났고, 이는 여러모로 각종 문제를 야기했다. 정부가 별 수 없이 마련한 특단책 :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자들의 동의를 구해 그들을 지구에서 덜어내자.
그가 열심히 써낸 자기소개서의 핵심 항목은, 자신의 무가치성을 증명하는 것. 5천만 원은 사내의 목숨 값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가치성을 증명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잡초가 새싹을 위해 자리를 내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