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민수를 기억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났고, 매사에 무표정하고 말주변도 없는 아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감도 안 오던 녀석. 나는 어느 날 그가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열광하는 몇 안 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였다. 그 애니메이션은 나와 민수의 최대공약수가 되었고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그는 나에게 많은 만화를 추천해주었고, 그 추천은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취향이 곧잘 맞았다.
하지만 이듬해, 우리는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점점 연락은 뜸해져 갔다. 시간이 흘러 흘러 나는 그럭저럭 공대를 졸업하고 썩 괜찮은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다만 근무지가 지방인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종종 비좁은 기숙사 독방에서, 나는 내키기만 한다면 어디로도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동시에 늘 아는 길, 가던 길로만 다니는 시시한 어른이 된 게 아닐까 한탄했다. 취미라고는 내 유년시절부터의 오랜 취미, 만화를 찾아 읽는 것이 전부였다.
만화는 의외로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만화의 주인공이 한계를 넘어서고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서사 구조는 일시적이나마 나의 다 꺼져가는 마음에 정열의 불씨를 지펴준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 나도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지는, 그런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러니까 만화를, 나의 우울한 생을 어떻게든 연장시켜주는 땔감 정도로 비유할 수 있겠다. 어느덧 내가 만화를 찾아 읽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강박이 되었는데, 나에게는 만화가 우울증 약이었다.
다만, 수많은 작품을 찾아 읽었지만 나를 반영구적으로 움직이게 할, 나의 무한동력이 될 작품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점점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시시해져 갔다. 수없이 읽어도 질리지 않던, 민수와 함께 봤던 작품들도 더는 견딜 수 없어 중간에 관둬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감히 나의 인생 작품이라고 부를 만한 만화를 발견해내고야 만다. 작품은 현재 약 50화까지 나와 있었고 아직 연재 중이었다. 왜 이제야 알게 된 건지 싶었다. 그런데 이 만화, 몇 화 읽다 보니 그리운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나는 나중에 이런 결말의 만화를 그려보고 싶어"
민수는 어린 나이었지만, 타고난 작가였고, 스토리텔링의 귀재였다. 다만 그림은 쥐뿔만큼도 못 그렸다. 그는 그럼에도, 소설가가 아닌 만화가를 꿈꾸었다. 나는 의외로 그림에 소질이 있었는데, 같이 만화가에 도전해보지 않겠냐는 그의 제의에 "나는 만화는 보는 것으로 족해. 나는 불확실함에 몸을 던지고 싶지 않아"라고 매정하게 답변했고, 이윽고 자사고에 붙어 그와 멀어져 갔다.
민수는 도전 만화에 그의 작품을 투고했었고, 꾸준했다. 그림에 딱히 재능이 없던 녀석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베스트 도전 만화로 승격할 수 있었으나, 그의 만화는 대중의 눈길을 전혀 끌지 못했다. 그 아이는 제 풀에 잔뜩 지쳐 만화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뜸했지만 가끔이나마 했던 연락은 어느덧 완전히 끊겨버렸다.
그런 그가 기어코 그림 작가를 구해, 그의 오래된 염원을 성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첫 몇 화를 읽는데 준비 많이 했구나, 굉장하다, 싶었다. 나는 이 만화의 연재분을 끝까지 다 읽으면 그에게 전화 한번 걸어보자 싶었고, 나는 일주일에 걸쳐 그의 만화를 독파해 나가기 시작했다. 미리 보기 3개도 결제해서 전부 읽었다. 만화는 결말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고, 이제 결말만을 남거두고 있었다.
다만, 그가 예전부터 그려내고 싶었던 결말과는 노선이 꽤 틀어져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댓글로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에 대해 훈수를 두고 있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결말과 이야기의 진행 방향은 완전히 대척점에 있었고, 처량한 별점이 그 사실에 쐐기를 박았다. 사람들의 반응이 이야기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마지막 몇 화는 이도 저도 아니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있었다. 민수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전화를 몇 번 걸어보았지만 계속해서 불통이었다.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는 결코 사람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주와 다다음 주에 마지막 이야기가 연재되었다. 만화의 결말은 사람들의 여론을 충족시켜줄 만한 무엇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인데! 아쉬운 마음을 넘어서 화가 났다. 그 녀석이 그리고 싶던 결말은 이 따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후로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결말은 충격적이었고, 그 녀석과는 연락이 통 닿지 않았다. 나는 내 약이 되어 줄 좋은 만화를 더는 찾을 수 없었고, 나의 일상은 점점 더 메말라갔으며, 그에 맞추어 내 몸은 볼품없이 야위어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고, 내 정신은 점차 한계에 도달해갔다. 영원할 줄 알았던 첫 여자 친구와 이별했을 때보다 배로는 힘들어했던 것 같다. 내 정신이 한계에 도달해서 파멸하기 일보 직전에, 우편으로 영문 모를 만화 원고가 나에게 배송됐고, 나는 그 수십 장의 원고를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내었다. 참으로 미숙한 그림체였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결말이었다. 엔도르핀이 온몸에 퍼져나갔고, 도파민이 나를 안절부절 못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컷의 좁은 여백에 그의 필체로 작게 글이 써져 있었다.
"나는 이제 나의 전부를 불태웠어. 마침내 내가 그리고 싶던 결말을 그려냈고, 너도 아마 이런 결말을 기다렸겠지? 나는 이제 세상에 더 이상 남길 것이 없어."
만화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고, 이미 때는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는 결코 사람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는 만화를 더 이상 찾아 읽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결혼해 아들을 가졌고, 내 아이는 만화를 참 좋아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로 자라났다.
그는 어느 날 너의 만화를 찾아내 읽고는, 나에게 와서 투덜댔다. 이 만화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런 결말로 끝났어야 했다고. 그것이 잘 된 결말일 거라고.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아이는 참으로 당황한 듯싶었다.
나는 아이를 꼭 꼭 안아주었다. 아이는 숨이 막히다며 내 품 안에서 발버둥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