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했다. 감격해서 눈물 흘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프리미어 리그에서 슈퍼 쏭이 득점왕을 차지했던 그 어둑한 새벽, 나는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감동이냔 말이다. 그가 월드클래스이고 세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한국인인 것은 알겠다만 그래서 그게 도대체 왜. 나한테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고 아무것도 와닿지 않는단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외계인이 지구에 찾아왔다. 그들은 축구장만한 우주선을 타고 영국 버킹엄 궁 앞마당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조용히 내려왔다지만, 그들 바로 밑에 있던 수백의 사람들은 그대로 바스라졌다. 이윽고 세계 곳곳의 특파원들이 우주선 입구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주선의 문이 열리고 제트 부스터를 신은 외계인들이 지구의 땅을 밟았다. 그들은 지구의 중력이 우스운 듯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카메라 셔터가 빛을 뿜으며 무수히 찰칵였고, 겁 없는 특파원들이 그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자 그들은 거슬린다는 듯 광선 무기로 특파원들의 뇌를 단숨에 관통시켰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멍해진 특파원들은 오싹함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치며 달아났다. 발에 힘이 풀린 나머지 털썩 주저앉아, 그들에게 차인 자들은 찌그러진 채로 수십 미터를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영국 여왕을 보러 왔다. 영국 여왕은 10분 안에 얼굴을 내밀어라" 매스컴에서 대중들은 사람들의 덧없는 죽음을 애도하는 동시에 그들의 등장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구에 접근하던 중 관측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의 우주선에 스텔스 기능이 탑재된 것이다. 그들의 상상 이상의 기술력에 공학자들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의 목적이다. 지구에 관광 온 것인가 지배하러 온 것인가.
영국 여왕과 그 측근이 헐레벌떡 도착했고 그들의 음성은 계속됐다. 그들은 영국 드라마에서 들어봄직한 발음으로 영어를 정확하게 구사했다. 우리는 너희와 게임을 하러 왔다. 너네의 언어로 "축구"라고 불리는 게임을 할 것이다. 지구 시간으로 24시간을 주겠다. 내일 이 시간까지 멤버를 꾸려 우리 대표팀과 시합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영국 여왕은 질문을 하기 위해 입을 뗐다. "만약, 지구인들이 시합에서 진다면?" 그들은 낄낄댔고, 그 질문은 묵살됐다. 참으로 소름 끼치는 음성이었다. 전 세계가 떠들썩해졌다. 국제 축구협회는 급하게 최고의 라인업을 짜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었다. 축구 좀 안다는 유튜버들은 이때다 싶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지구의 올스타팀을 구상해서 영상을 찍어 올려댔다.
아무리 시시껄렁한 인생을 살고 있는 나더라도, 이번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지구의 존망을 건 축구 시합. 나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공놀이에 잉여로운 내 목숨이 달린 것이다. 시간은 술술 흘렀고, 다음날이 왔다. 나 역시 경기 내용이 궁금해져서 핸드폰으로 중계 플랫폼에 접속했다. 경기장의 열기가 후끈했다. 75억의 목숨을 짊어진 선수들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화면에 쏭이 잡혔다. 나는 왠지 모를 흥분감에 흽싸였다. 그 대단하다는 쏭! 나는 왠지 모르게 그가 무엇인가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나는 이 경우는 특수한 케이스라서 축구에 몰입하는 거라고 자위했다.
경기 시작 2분 만에 외계인들의 초고속 티키타카로 지구 팀은 한 골을 헌납했다. 골키퍼 꾸르타는 그 궤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망연한 모습을 보였다. 채팅창으로 방구석 전문가들의 훈수가 끝없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축구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나를 위해 정보를 주는 댓글도 간간히 있었다. 지구 팀이 반격에 나섰지만, 커트당했고, 역습을 허용해 10분에 한 골 더 헌납했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도, 지구 팀은 프로의 면모를 보여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전반 스코어는 3대 1이었다. 간신히 한 골 만회하나 싶었는데, 다시 한 골을 허용해버렸다. 절대 좋은 분위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화면에 잠깐잠깐 비치는 쏭의 아직 여유라는 듯한 표정에 나는 안심해버렸다.
후반전, 나는 경기에 점점 빠져들었고, 지구 팀의 집중력도 절호조에 이른 것 같았다. 다들 한 몸처럼 움직였고, 탄탄한 수비를 보여주며 공격 기회를 얻었다. 레게 머리의 선수가 중거리에서 찬 슛이 골대를 출렁이게 했다. 무회전 슛의 권위자로 불리는 남자란다.
외계 팀은 지구 팀의 예상치 못한 선전에 당황한 듯했다. 그들의 실책은 치명적이었다. 쏭은 이미 저 멀리 뛰고 있었다. 쏭은 적당한 위치에 떨어지는 공을 자신의 몸의 일부인 마냥 받아내고 골키퍼 및 수비수와 3대 1 찬스에서 좁은 공간을 비집어내고 슛 했다. 쏭의 동점골, 나는 전율감에 휘청였다. 경기는 계속되었고, 지구 팀의 공격 찬스에서 쏭은 수비수 세 명에게 둘러싸였다. 하지만 그는 침착한 볼 컨트롤을 보였고, 절묘한 패스로 부지런히 열린 공간을 찾아다니던 7번에게 공을 연결해줬다. 또 한 번 터졌다. 나는 왠지 더 이상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외계 팀이 한 골 만회해서 다시 동점이 됐지만, 쏭이 경기에 쐐기를 박았다. 한국 해설진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우리는 우주 클래스 쏭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구의 존망이 걸렸던 시합은 나를 알 수 없는 전율감으로 인도했고, 나는 쏭의 팬이 되었다. 나는 한때 축구에 별 관심이 없었고, 재미도 느끼지 못했으나, 축구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고, 축구 선수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에 나의 가치판단 따위는 세계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고 한탄했었다. 고작 원자 하나의 진동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이제 축구는 나에게 있어 더 이상 그깟 공놀이가 아니었다. 그날, 내 안의 무엇인가가 꿈틀거렸고 내 마음은 세상에 활짝 열려버렸다. 나는 왠지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고, 내 앞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