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생각 7
경주여행을 갔을 때 어느 독립서점에서 구매한 책이다.
묵혀 읽으면 맛이 좋은 건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읽었던 '대중의 반역'과 결이 반대인 책이라고 느꼈다.
중간 정도까지 읽다 든 생각은 '이것은 위험한 책이다'였지만
읽다가 생각하다가 나를 돌이켜 보고, 세상을 돌이켜 보자
너무나 슬픈 책이었다. 사랑에 대한 철학은 슬픈 철학이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말들과 생각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삶을 사랑하는지, 더 나아가 남을 사랑하는지 물어보고 대답해준다.
우리 인생의 슬픔과 공허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이 세상이 무엇이 잘못된 건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깨달음이 지적허영으로 끝날지, 행동으로 이어질지는 내게 달렸다.
1. 삶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이 없다면 어떤 인간과 문화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사랑' 그것은 너무나 간지러운 말이다. 그럼에도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고, 내 후손과 이웃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양자세계마저 손아귀에 넣으려는 인간에게 '왜 그런 행동을 지속하냐'라는 질문을 계속 이어나가다 보면 단순한 지적호기심이나 정복욕 때문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사랑 때문이다. 세상을 절망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어떠한 행위를 하는 인간은 없다. 방향이 옳지 못하거나 수단이 잘못된 것이지.
2. 하지만 삶은 놀라운 일로 가득하다. 무생명의 영역에 있는 질서와 비교하면 살아 있는 것은 ‘무질서하다’ 모든 생명체에게서 질서를 기대할 정도로 질서에 목매는 사람이라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질서에 대한 요구가 특히 강한 사람이라면 삶을 지배하겠다며 삶에도 질서를 강요하려 들 것이다. 그러다가 삶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지나치게 실망하고 분노해 결국 삶의 숨통을 끊어 죽이려 들 것이다. 삶을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아날 수 없기에 삶을 증오하게 된 것이다. 삶을 향한 그의 사랑은 실패하고 말았다. 어느 프랑스 노래가사처럼 ‘사랑은 자유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 사랑은 범용적인 말이지만 '옳은 사랑'은 있다. 상호간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 내 삶을 사랑하는 방법 또한 그렇다. 내 삶을 진정 사랑하기 위해서는 삶 자체를 사랑해야 하지 삶이 나아가고 목적하는 바를 욕망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모든 종류의 사랑에 적용되는 기본 원칙이 있다. 내 사랑이 적절하고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맞을 때만 나는 사랑할 수 있다....그러므로 단순히 사랑만 하는 것으로는, 다른 생명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식물이, 동물이, 아이가, 남편이, 아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지 정한 내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내 사랑은 파괴적이다. 내 사랑은 죽음의 키스인 것이다.
- 사랑을 줄 대상이 어떤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후술될 내용이긴 하나)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 나의 기준은 남의 기준과 정확히 들어맞을 수 없다. 차라리 무관심이 나을 것이다.
4. 따라서 자신의 잠재력을 키우고 남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편이 논리적일 것 같다. 그러나 폭력을 사용해 오래도록 우위를 차지하려는 모든 노력은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사실은 개인의 삶보다 역사가 더 인상 깊이 입증해준다....폭력과 달리 사랑은 인내를 전제로 한다. 내적 노력을, 무엇보다 용기를 전제로 한다.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실망을 참고 견딜 용기, 일이 잘못되어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 사람은 자신의 강인함만 믿으면 되기 때문에 그 힘의 왜곡된 형태인 폭력을 믿을 필요가 없다.
-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은 모두 사랑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한다. 일부 0.01%의 인간만이 그러한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종류의 조직들, 국가들, 법인들은 오로지 효율만을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목적 자체가 효율이고 자기보호를 위해 탄생한 것이기에 사랑의 감정을 기대하긴 어렵다. 역으로 0.01%만이 사랑의 감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주요한 플레이어들은 개인이 아니다. 조직이고, 시스템이고, 국가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서로 반목한다. 폭력 수단을 소유하고 다른 조직을 어떻게든 이기고 복속하고자 한다. 나는 그것이 이 세상의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떤 조직에 사랑을 기대하고, 인내할 용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전략적 인내와 물리적, 비물리적 위력만이 유일한 대화 수단인데 말이다.
5. 고요를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은 없다.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인생의 가장 큰 기쁜은 장치가 없어도 느낄 수 있다는 사실, 고요할 수 있는 능력, ‘무언가에 뛰어들’ 능력, 집중하는 능력이 있으면 된다는 사실 말이다.
- 다시 개인으로 돌아오자. 조직을 구성하는 것도 개인이니, 일단 우리부터 고쳐져야하지 않겠는가.
- 고요한 상태가 언제였던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TV와 스마트폰은 끊임없이 정보를 제공한다. 주변 사물은 웅웅거린다. 고요한 상태에서 어딘가에 온전히 집중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이 반복된다. '해야할 것들', '신경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의식적으로 차단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6. 나무가 금방이라도 응답할 것처럼 나무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 나무 하나만 바라보아도 무한히 바라볼 수 있다. 시간과 사물을 조합하면 경우의 수는 무한대이다. 이를 단편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실제론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보통 우린 추상을 사용한다. 나무를 분류하고, 크기와 계절을 상상하면 그 나무의 전체를 안 것과 같이 단순화시켜 보는 것이다. 나무가 금방이라도 응답할 것처럼 본다는 것은 내 생각에... 직관의 영역이다. 내가 그 나무가 되어 느끼는 것이 곧 대답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대답은 내 상황에 대입하여 상상한 일종의 착각일 수도 있으나, 최소한 나무를 공간적으로 미분하고, 시간적으로 미분하여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관찰방법보다는 내가 바라보는 저 나무가 진정 어떤 것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되리라 생각한다.
7. 정말로 우울한 사람은 슬픔의 감정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고통에서 건져주는 구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다.
8. 나는 수천 년 전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가 서로 만나지 않았어도 대체로 동의했던 삶의 기본 규범과 가치가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 이 부분은 대중의 반역과 비슷한 논지였다. 우리 호모사피엔스는 등장 이후로 유전적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식은 한 없이 쌓여갔으나, 몸과 정신은 그 때의 그대로 라는 것이다. 태어나는 방법도 죽는 방법도 결국 똑같다. 그렇기에 삶의 기본 규범이라는 것이 수천년 수만년을 지나도 동일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9. 20세기 익명의 권위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시장이요 여론이며 건강한 인간 이성이다. 모두가 하는 행태이며, 남들과 같길 원하는 바람이며, 무리에서 멀어지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 다름을 두려워 하지 말자. 내 정신은 세계와 수많은 상호작용 끝에 태어난 유일한 것이다. 나무 하나도 무한히 바라볼 수 있듯 내 자신도 무한히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비슷해보여도 모든 것은 다르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같을 필요도 같을 수도 없다.
10.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바깥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 존재할 뿐, 우리가 입으로만 신봉한다고 고백한 목표, 즉 완전한 인성 발달, 완전한 인간 탄생과 성장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 점점 슬퍼지는 대목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남의 눈을 의식하고 살아온 것 같다. 사회적으로 좋은 '자식', '남편', '동료' 그런 것들에 너무 집착한 것은 아닌가? 나는 누구인가? 진정으로 고민했던가? 고민했다하더라도 그 고민의 결과에 따라 나는 행동했던가? 이런 자조적인 글을 쓰고 그냥 또 세상에 휩쓸려 살지는 않았던가? 나는 나를 사랑했는가? 내가 진정으로 하고픈 바를 찾아주려는 노력을...누구의 도움없이 해 본 적 있던가... 그래서 와이프한테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찾아보라고 등 떠밀어 주는 사람. 용기내보라고 하는 사람.
11. 평등은...즉 모든 인간은 자기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며,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권리가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오늘날엔 대부분 평등을 동일로 이해한다. 동등하다는 말을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논리를 펼친다. “동등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과 같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강요하지 않는데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진다.
- 대한민국은 같지 않으면 살기 힘든 곳이다. 이 즈음에는 이런 것을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것을, 저런 것을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인생이다. 그리 살면 편하다. 내가 내 정답을 내릴 이유도 필요도 없이 따라가면 안락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혹은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 길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니 실패해서 떨어지면 세상을 원망한다. 내가 내린 결정이라면 또 다른 결정을 내리면 될 것인데 말이다. 세상을 원망해도 들어주지 않고, 낙오자가 되면 낙인을 찍는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등과 겨드랑이에 땀이 찬다. 내 권리를 찾기 위해. 낙오자에겐 비낙오자가 가진 권리를 당연히 행사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되는 것 같다. 죽지말고 살면 좋겠다.
12. 창조성은 세계를 인식하고 그 세계에 대답하는 자세다. 실제로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지 않거나 아주 제한적으로만 인식한다... 나무를 남김없이 직접 경험하는 것, 그 나무의 본질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무를 보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 마치 어느 스님의 말씀 같다. '나무를 보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참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준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고... 아리송하면서도 명확한...
13. 현대의 다른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수단은 실제로도 수단으로, 목적은 실제로도 목적으로 놔두어야지 둘을 뒤죽박죽 섞지 말자고 결심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것의 목적이라는 서구의 종교와 인문주의 전통에 진심을 다하자고 결심해야 한다. 진심을 다하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그 전통에 찬동은 해야 한다. 지금은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다시 인간에게 윗자리를 돌려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 사물이 인간을 지배한다. 최근 차를 사는 과정에서, 차를 모는 과정에서 느꼈던 것이다. 자동차는 분명히 이동의 자유를 준 것은 맞지만, 그 방법은 자동차가 운행되는 특정한 방식에서만의 자유이다. 차를 타면 내가 걸으면서 뛰면서 앉아서 느끼는 그러한 자유는 느끼지 못한다. 그 경험들은 저 멀리 차창 밖에만 펼쳐질 뿐이다. 가는 길에 느껴지는 바람과 소리는 차창에 가려지고, 바퀴의 소음에 차단된다. A에서 B까지 가는 것만이 목표라면 차를 모는 것은 굉장히 효율적일테지만 A에서 B까지 가는 그 경험자체가 목적이라면 그릇된 선택이다.
+ 책을 읽다가ᆞ 카페에서, 직원들 웃음소리가 들린다. 카페 뒤편에는 작은 비바리움 공방과 파충류 사육장이 있다. 일하는 것 자체가 즐겁고, 본인들이 좋아하는 일과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즐거운 웃음이다. 직장에서, ‘아 퇴근하고 싶다’고 연발하며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 말고 진정으로 자기 일에 자부심과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 혹은 그런 나 혹은 그런 환경을 만들면 얼마나 즐거울까. 심각하지 않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 창조적으로.
- 지금 있는 곳이 싫다는 것은 아니다. 문득 마음이 아파졌을 뿐이다.
14. (칼뱅의 사상 관련) 인간이 자신에게서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할 경우 그의 죄 많은 자기애가 드러난다. 이런 사랑은 그를 유혹해 남 위에 서고 남을 멸시하게 만든다. 따라서 자신이나 자신의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큰 죄다. 칼뱅에 따르면 그것은 타인을 향한 사랑을 배격하며 이기심과 동일하다.
- 설명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어서 따라가기 벅찼던 부분이다. 앞뒤 맥락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작가는 나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게끔 하는 사상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15. (니체의 사상 관련) 니체가 반대하는 ‘사랑’은 강인함이 아니라 나약함에 뿌리내린다. 그대들의 이웃 사랑은 그대들 자신을 향하는 그릇된 사랑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피해 이웃에게로 도망치며, 그렇게 해서 덕목을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이타심’의 정체를 꿰뚫어 본다. “그대들은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을 잉여의 증거로 본다는 점이다. 사랑의 조건은 베풀 수 있는 개인의 힘이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이런 내면의 힘에서 솟아날 때만 덕목이다. 인간이 그 자신일 수 없다면 그 사랑은 악덕이다.
- 작가가 말하는 '사랑'이란 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샘에서 솟아오르는 샘물같은 것이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디서 어떤 마음이 나와 남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삶을 사랑하는가'인 것이다.
16.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마라’는 다음 내용을 포함한다. 네가 바라는 것을 하지 말고 부모의 권위를 위해, 더 자라서는 사회의 권위를 위해 너의 의지를 꺾어라!...‘너를 사랑하지 마라’ ‘너 자신이 되지 마라’ ‘너 자신보다 중요한 것에, 너의 바깥에 있는 권력이나 그 권력의 내면화인 의무에 복족하라’
- 칼뱅의 사상을 비판하며 나온 내용이다. 나부터 사랑하라.
17. 15~16세기의 경제 및 사회 변화는 중세의 사회 구성원들이 느끼던 안정감과 소속감을 부수어버렸다. 변화는 시민, 농민, 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빈곤해지고 물려받은 경제적 지위도 위태로워졌지만 동시에 경제적 성공을 일굴 새로운 가능성도 존재했다.... 영적인 연결이 끊어졌다....성공과 실패는 시장의 법칙에 달렸다...무자비한 경쟁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모든 변화의 결과는 새로운 해방감이지만, 그 대가는 더 큰 불안이었다. 이런 불안은 다시금 종교나 세속의 권위에 이전보다 더 복종하겠다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불어넣었다. 그리하여 한편에선 새로운 개인주의가 등장했고 다른 한편에선 불안과 복종이 나타났다. 이 둘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 프로테스탄티즘과 칼뱅주의다...하지만 바깥의 권위에 복종한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이 권위를 내면화했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기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의 주인에게 복종하는 노예가 되어버렸다. 내면의 주인은 혹독하게 일하라고, 성공을 위해 매진하라고 채근했지만, 자기 자신이 되도록, 스스로 만족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았다.
-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이 중2병스러운 표현이 어쩌면 외부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반항이었지 않을까? 그 때는 반항해도 되는 때이니까. 그래도 이해받을 수 있는 시기니까. 점점 나이가 들면 세상의 이치에 복종한다. 남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느낀다. 이미 그러한 권위와 불안이 내면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걸 좀 벗어던져보자. 제발 조금이라도 노력해보자.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는 있다. 다름을 인정하는 세계로 말이다. 그 과정에서 다름을 조금이라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다시 또 배척하는 폭력이 PC주의, 이기적인 페미니즘과 같은 것으로 되돌아오곤 있으나,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분법적 세상과 다원적인 세상이 서로 충돌하며 서로를 이해하다보면 균형을 찾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상황이든지 사람은 사람을 증오하기보다는 사랑하길 원하는 존재니까.
18. 이웃 사랑을 천명하지만 자기애는 금기시하는 원칙은 나를 다른 모든 인간 존재에게서 떼어낸다. 하지만 인간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경험은 인간 존재로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인간 연대란 없다.
- 사랑을 지속하는 힘은 나로부터 비롯된다. 남에게 사랑을 줄 때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행동 원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마르지 않는 샘이 필요하다. 나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말자.
19. 자신을 사랑하는 자세는 조금이나마 타인을 사랑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을 향한 증오 역시 타인을 향하는 증오와 떨어질 수 없다.
- 작가는 사랑도 증오도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아래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작가는 나와 같이 상황을 아주 긍정적으로만 보진 않는다. 사람들 내부에 증오라는 성격이 자라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작가가 말하는 '반응적 증오'(나와 사랑하는 이가 공격당할 때 당연히 생겨나는 증오 반응)와 다르다. 증오라는 성격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고 특정 상황이 주어지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표현은 없지만 '반응적 사랑'과 '성격적 사랑' 두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 작가의 설명에 따르고..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문제는 '성격적 증오'와 '성격적 사랑'은 병존할 수가 없다. 이는 그 둘이 발현되는 원인이 동일(부모의 사랑 또는 거절)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사랑만 주는 부모도 없고, 거절만 하는 부모도 없으니까 말이다.
20. 증오는 반응적 증오와 성격으로 인한 증오로 나눌 수 있다. 반응적 증오란 나의 삶, 안전, 이상 혹은 내가 사랑하고 동일시하는 타인이 공격당할 때 나타나는 증오 반응이다...,공격하는 자를 몰아내는 것이 목표이기에 공격하는 자를 무찌르고 나면 멈춘다. 성격으로 인한 증오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린 시절에 겪은 특정 경험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난다...미워하겠다는 꾸준한 마음가짐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그 무언가가 담겨 있다.
21. 반응적 증오는 증오를 일으키는 것이 상황이다. 성격으로 인한 증오는 반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적개심이 상황으로 활성화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존재하던 증오가 활성화되면 마치 숨어 있던 적개심을 표출할 합당한 기회를 찾아 기쁘기라도 한 듯 당사자에게서는 안도감 같은 것이 엿보인다.
22.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자기애 결핍은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서 가장 자주 나타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노예로 부린다. 자기 바깥의 주인을 섬기는 대신 주인을 자기 안으로 들여놓았다. 이 주인은 엄하고 잔인하다. 잠깐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는다. 즐거움과 만족도 금지한다. ...그래도 하려면 몰래 해야 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 자기애의 결핍으로 인해 권위를 내면화 했다는 설명이다. '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게 느껴지는 것은 내면에 프로테스탄티즘이 만든 '열심히 일하고 축재하고 구원받아라'라는 주인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내 안의 결핍이 없었다면 주인도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미 '나'라는 주인이 있으니 말이다.
23. 우리는 언어 중 ‘사랑’만큼 악용되고 치욕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자기 목적에 유익하다면 그 어떤 잔인함도 눈감아줄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찬양한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해 자기 행복을 희생하라고 강요하고, 그 희생으로 덕을 볼 사람에게 자아를 완전히 줘버리라고 강요한다.
- 나는 사랑을 생각하면 이기적 유전자를 생각했다. 부모가 무조건적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유전자가 1/2가 들어있는 개체가 있기 때문이고, 할머니가 손자를 사랑하는 것 또한 본인의 유전자가 1/4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한 생물학적 사랑은 불가피하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표현형으로 태어난 이상 유전자가 설계된 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어야 한다. 나는 1/1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 생각은 틀렸다. 틀린 부분이 많다. 정신은 생각보다 강하다. 문화적 유전자라고 명명한 밈(meme)이 오히려 유전자(gene)보다 강했던 것이다. 작가가 주목한 부분은 meme이다.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수단'이 gene을 멀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니, 의식적으로라도 나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계속 제시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수단들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왜? 나를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으니 그러한 사상들이 우리 안에 자리잡을 수 있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24. 흔히 서로 결합된 두 가지 현상을 사랑이라 부른다. ‘마조히즘적 사랑’과 ‘사디즘적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마조히즘적 사랑’은 자신보다 강하다고 느낀 다른 사람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 자신의 자아, 자발성, 온전함을 포기한다....자신의 자라ᅟ글 버리고 타인의 일부가 되어 그에게서 안정감을 느끼고...우상숭배의 한 형태이며 자아의 말살이기도 하다. ‘사디즘적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삼켜 의지라고는 없는 도구로 만들어 제 손아귀에 넣으려는 욕망에서 생겨난다....불안과 무능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타인에게 무한 권력을 휘둘러 강해지고 안전해지려 한다.
25. 자유와 독립이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생 사이비 사랑과 달리 사랑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유와 평등이다. 사랑의 조건은 혼자서도 제정신을 유지하며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자아의 강인함과 독립성, 온전함을 갖추는 것이다.
- 계속 반복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조건은 나를 사랑하는 조건과도 동일하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마르지 않는 샘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아의 강인함과 독립성이 필요하다.
26. 설리번이 생각하는 사랑의 특징은 사랑 받는 사람의 만족이 사랑하는 사람의 만족만큼 중요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27. 때로 한 사람의 눈과 귀와 코는 뇌 못지않게 뛰어난, 아니 뇌보다 더 우수한 긍정의 기관이다.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보다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을 더 강렬히 표현한 구절은 없을 것이다.
- 이건 논지에서 약간 비껴났던 부분이긴 한데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서 남겨놨다. 가끔은 눈과 귀와 코가 먼저 반응한다. 우리 감각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28. 사랑은 사랑하겠다는 꾸준한 마음가짐이다. 따라서 사랑을 '근본적 호감'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특정 대상은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겟지만 사랑의 원인은 아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하겠다는 마음가짐은 미워하겠다는 마음가짐과 마찬가지로 성격이다.
29. 긍정적인 전제 조건은 간단명료해서, 어릴 때 경험한 다른 사람의 사랑이다. 부정적 전제 조건은 만성적 증오의 발생에 책임이 있다고 언급한 모든 요인의 결핍이다. (익명의 권위로 성장의 충동이 가로막힐 때, 자유를 박탈당할 때, 외부의 권위를 내면화하고 얌전한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을 때)
30. 특정한 대상을 향하는 사랑은 무의식적 사랑이 특정한 사람을 목표로 활성화되고 집중화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온 세상에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기에 그를 마나는 것이 인생의 큰 기회라고 믿는 낭만적 사랑관은 옳지 않다. ...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인간 자체를 향한 사랑을 뜻한다(뜻해야 한다에 가까운듯)
- 증오와 사랑은 양면적인 것처럼 보인다. 내게 사랑을 주거나, 내가 좋아하는 외모나 행동이 있으면 그 사람을 '반응적'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격적인 사랑은 (증오가 만성적인 적개심이듯) 인류애다. 그가 주는 것(느껴지는 것)과 관계 없이 그저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 사랑이 애로스적 사랑일 필요는 없다. 그 인간 자체를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31. 따라서 원칙적으로 나 자신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의 대상이어야 한다.
32.(증오와 사랑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말한 원칙의 또 다른 사례는 미적 감각이다. 항상 아름다운 것을 볼 마음가짐이 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계속 아름다운 그림, 사람, 장면을 본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것을 보게 되면 늘 존재하던 마음가짐이 활성화 된다. 미적감각은 그들이 보고 있는 대상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아니다....언제나 존재하며 외부 자극을 통해(유발되는 것이 아니고) 활성화되는 수많은 마음가짐의 구조가 성격이라는 것이 내 입장이다.
33. 이기심이 바로 이런 자기애 결핍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불안하다. ... 나르시시스트는 자신도 타인도 사랑하지 않는다.
- 처음에는 사랑에 관한 철학이라 생각했다. 뒤로 갈수록 불안의 철학에 가까웠다. 불안한 이 마음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려는 '것'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게 만들었다.
34. (과잉보호하는 어머니, 과잉관심을 보이는 배우자) 사실은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다. ... 그들의 과잉 관심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존재하는 적개심을 보상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과하게 사랑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상대를 그 자체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딘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 대상이 무엇이든 완전한 인격체든 그 자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을 주는 것이다.
35. 민주주의는 개인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지성과 감성, 관능의 가능성을 모두 갖춘 자아를 긍정할 깊은 감각을 키울 만큼 개인을 지지하지 못했다. 개인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생산과 이윤의 요구에 복종하라고 강요한 청교도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유산은 파시즘이 대두할 조건을 마련했다.
-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 지금의 시대정신이다. 한때 숙의민주주의라는 것이 유행아닌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다수결 투표에 붙이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의견의 타협점을 찾자는 취지였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기업과 국가간의 경쟁은 치열해지자 이러한 사치는 사라졌다.
- 인터넷 밈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돈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라'이다.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 될 것만 같은 세상이 왔다. 돈은 효율이고 시간이다. 민주주의의 다수결이 아니지만 지금은 다수결 이상의 의미가 없어 보인다.
36. 완전하게 인식할 경우 추상이 없다 .나무는 완전한 구체성과 더불어 그것만의 유일성을 띄게 된다.
- 책의 구성 자체가 여러 단편적 글들을 모은 것이다 보니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37. 다른 사람을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투영과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어절 수 없이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다.
- 이렇게 되려면 내가 바로 그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바라보면 안다. 알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38. 창의적 자세의 전제 조건은 무엇일까...감탄하는 능력이다..,두번째는 집중력인데...
- 책에는 완두콩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의 일화가 나온다.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고 감탄할 수 있는 능력.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을 사랑하면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성격적인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길게 설명했나 보다.
39.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나 미래에 산다. 하지만 실제 경험으로서의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식과 응답 역시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
- 맞는 말이다.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잘못 이해해서는 안된다. 욜로가 아니다. 무제하적 소비주의는 삶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 뿐이다.
40.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 '나다'라고 느끼는 그 순간에 '나는 너다'라는 감정도 느끼게 된다. 나는 온 세상과 하나인 것이다.
41. 갈등은 해로운 것이기에 피해야 한다는 착각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 반대가 맞다.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키우는 원천이다.
- 이게 맞는 예시인지는 모르겠으나, 와이프와 싸울 때 서로 의견이 달라서 첨예하게 부딫힐 때 그녀의 말에 가끔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싸움이 끝나고 나면 본인이 어떤 말을 했는지 까먹어버리지만...작가가 끊임 없이 얘기 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글 한 편 읽어보지 않고 정확히 꿰뚫는다.
42. 평준화로 흘러가버린 그릇된 동등권 사상 탓에 우리는 이 양극성을 심하게 축소했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사물로 변할수록 남성과 여성도 사물이 되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양극성도 축소된다. ... 오늘날 평등은 무리와 달라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동일이다. 차이가 평등의 원칙을 위협할 수 있다는 공포가 널리 퍼져 있다. 나는 이런 입장을 극복해야만, 동일의 자리에 다시 진정한 평등을 앉혀야만 창의성이 자랄 수 있다고 확신한다.
- 평등하다는 것은 다름을 전제로 한다. 각자가 가진 고유의 개성을 존중해야 평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존중 없이 동등하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의사가 그러한 자리까지 오기까지 어떠한 노력을 거쳐왔는지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의 전문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환자가 어떤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지 이해해줘야 한다. 그의 무지에 대해서 인정해주어야 한다. 각자가 원하는 것만 바라는 것만 말해서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책임없는 요구는 어리광에 불과하다.
43. 인간은 안전을 뜻하는 이전 상태를 떠나기 무서워하지만 자신의 힘을 더 자유롭고 완전하게 사용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욕망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간다. ...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만을 믿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자신의 창의성만 믿을 수 있는 용기 말이다.
- 나와 나의 갈등. 그러한 상황에 나를 밀어넣어라. 그리하여 나오는 결과가 너의 성격이다. 무시무시한 말이다. 이렇게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데 말이다. 작가는 지금 안온한 상태가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럼에도 공허하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 깊숙히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조금은 다른 시도를 해보아도 되지 않겠는가? 공허함이 없어지는지, 불안함이 없어지는지 말이다.
- 어떻게 보면 역치값을 계속 높이는 작업같기도 하다. 고통을 계속 주면 그게 나중에는 고통인줄 모르듯 극한의 불안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그것이 불안인지도 모를지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불안에 떨며 살것인가. 극한의 불안을 마주하고 나 자신을 찾아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을 것인가?
44. 우리는 죽음을 은폐하고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 자연은 우리에게 지배 대상이었다. ... 죽음은 사실상 자연 지배라는 우리의 신화를 반박하는 유일한 현상이다.
45. 가짜 활동성과 진짜 활동성은 구분하기 매우 힘들 때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분주함(가짜 활동성)은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에까지 뻗어나가며, 정작 해결해야 할 과제의 근본 특성과는 관련이 없다.
- 가짜 노동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 분주하면 불안이 사라진다. 바쁜 척하면 멈춰있다는 착각은 사라진다. 그저 아무런 발전이 없다하더라도 말이다.
46.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신과 사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려면, 첫 번째로 결정적인 힘과 상황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부족한 깨달음과 무지는 개인을 무력하게 만들며, 그 무력함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온갖 망상을 동원해 절망적으로 저항한다 해도 결국 개인은 내면에서 그 무력감을 인식하게 된다.
47.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이론에 큰 관심이 없다.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달라질 수 있는지 설명하는 이론 역시 따분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설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추상적 지식을 넘지 못한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 자료나 시 혹은 세계관처럼 정신적 자산에 머물고 만다.
- 경고한다. 너는 행동할 것인가?
48. 과거와 현재의 인류 역사 대부분을 지배한 원칙은 '일하지 않은 자여, 먹지도 마라!'다.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소련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협박은 인간을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할 뿐 아니라 아예 달리 행동하고픈 유혹에 빠지지도 않게끔 생각하고 느끼도록 강요한다.
49. 기본소득은 '자유'의 구호를 현실로 만들 분 아니라 서구의 종교와 인문주의 전통에 깊이 부리내린 원칙, 즉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나 살 권리가 있다는 원칙의 정당성을 확인해 줄 것이다. ... 설사 그 사람이 사회에 '유용'하지 않다 해도 말이다. ... 결핍의 심리학에서 과잉의 심리학으로 이행한 것은 인간 발전의 가장 중요한 발걸음 중 하나다. 결핍의 심리학은 불안과 질투, 이기주의를 불러온다. 과잉의 심리학은 자발성, 삶에 대한 믿음, 연대감을 생산한다.
50. 내가 보기에 물질적 자극은 결코 일하고 열심히 노력하게 하는 유일한 동기가 아니다. ... 자부심, 사회적 인정, 일하며 느끼는 기쁨 같은 다른 동기도 있다.
51. 인간은 '소비하는 인간(호모 컨슈멘스, homo consumens)으로 변해 버렸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고 수동적이며 날로 더해가는 끝없는 소비로 텅 빈 마음을 보상하려 한다.
52. 현대인은 점점 더 많은 소비를 바라며 끝없는 공복감에 시달린다. 그 결과 소비의 탐욕은 끝을 모르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만인이 소비할 수 있을 만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소비하는 인간'의 성격 구조가 지배하는 동안에는 결코(심리학적으로 볼 때) 진정한 과잉은 불가능 하다.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얼마를 갖고 있건 결코 충분히 얻지 못할 것이기에 항상 결핍에 시달릴 것이다. ... 이런 이유로 나는 기본소득이 일정 정도의 문제(경제적, 사회적 문제)만 해결할 뿐이며 최대 소비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라는 급진적 효과는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52. 최대 소비 시스템을 최적 소비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
53. 기본 소득 이념 말고도 연구가치가 있는 생각이 하나 있다. 일정 소비재의 무료 소비다. (빵, 우유, 채소) ...내 생각에 무료소비는 인간의 삶에서 새로운 차원을 열어줄 것이다. 인간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기본 원칙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 완전히 새로운 자유를 경험할 것이다. ... 기본 소득 문제 역시 굳이 현금으로 지불하지 않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짜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54.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제한 소비의 제약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상 가지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진짜 부자들뿐인데도 말이다. 여러 상표의 같은 소비재와 여러 종류의 소비재가 생존 투쟁을 벌이면서 개인의 자유라는 망상을 만들어낸다.
- 자본주의가 만든 세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왜 우리가 결핍을 느끼는지 작가는 설명한 뒤 그 결핍을 채우는 것이 소비가 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소비는 계속해서 우리를 공허하게 만든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대의 소비를 한다하더라도 그 옆에는 새로운 소비가 자리잡고 있다. 수많은 제품의 선택지가 제시되어 있다. 불안해서 소비하지만 내 소비가 맞았는지 또 불안해진다. 뒤쳐질가 두렵다. 내가 내자리에서 자리잡고 강건하게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다면 그런 불안은 없을테지만 우리는 소비의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린다. 문제는 사회구조가 우리의 불안을 계속해서 자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렇게 되어라고 작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신용이라는 자본주의의 특성이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신용은 먼 미래에 큰 할인율을 가까운 미래에 작은 할인율을 적용한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값을 매기는 것이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국가든 그러한 신용을 바탕으로 자본을 빌리면 신용에 적용된 할인과 실제 산출할 수 있는 이익의 차이를 가져간다. 물론 부도가 날 수도 있다. 다만 이익의 차이을 가지겠다는 목표로 신용을 활용했으면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어떤 방안이든 투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산한다. 무너진다. 그 사이 개인은 이익 최대화의 수단이 된다. 마케팅이 범람하고 제품이 세분화된다. 끊임없이 불안을 자극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제품을 소비하면 그들이 만들어낸 그 불안을 제거할 수 있다고 홍보한다. '내 자신'이 없는 우리는 거기에 우리를 내어준다. 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은 자들이 넘쳐난다. 그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아니면, 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해야만 한다. 그래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긴다.
- 결국 우리는 소비자로 전락한다. 온전한 인간은 없어지는 것이다. 소비는 불가피하다. 그것은 당연하다. 다만 최대의 소비가 정답은 아니다. 뒤에서도 나오겠지만 최적의 소비가 있다면 그 이상은 불필요한 것인데 불안을 자극 받은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를 강요당한다. 불쌍하게도 말이다.
- 자본주의는 그렇게 점점 세를 키워간다. 점진적 자기복제다. 자본주의는 앞으로 나아가는 시스템이다. 멈추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외발자전거다. 멈출 수 없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달려나가야만 하는 꼴이다. 그 덕에 우리는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지만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가속도가 붙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그 와중에 세탁기 통안의 빨래들처럼 탈수되어 간다. 지친다. 본인이 왜 태어났는지 어째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지 어째서 내 후손을 둬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유전자의 본원적 명령마저 거부한다. 아니 거부되어진다.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생물학적 지침마저 무용하게 만드는 속도로 굴러간다. 탈수된다. 그 끝이 어딘지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자살을 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 생명이 없어져간다. 생명이 깃들 자리가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 자본주의가 처음 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에도 이러한 결말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천히 굴러갔을 테니까 말이다. 이것은 마치 세상에 처음 등장한 바퀴와 같다. 그런데 넘어지지 않는 바퀴였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삶이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형태로 귀결된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그 바퀴에서 벗어나버리거나 그 속도에 맞추는 수 밖에 없다. 바퀴에서 벗어나면 저 멀리 바퀴가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박탈감을 느낀다. 바퀴에 속도를 맞추려면 나 또한 그 안에서 그 속도에 맞춰 달려야 한다. 진퇴양난이다.
- 사실 작가는 이도저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다 함께 조금은 속도를 늦춰보자고 얘기하는 것인데, 속도가 늦어지면 과도한 신용을 써버린 조직과 국가와 개인들은 무너질 것이다.
55. 즉 인간의 창조와 문화가 낳은 풍요로운 세계마저 예외 없이 소비품으로 만드는 성격 구조가 발달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현상이다. ...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러한 소비 자세의 실체가 무엇인가? 이 질문으로 우리는 이미 역동적 개념과 관념에 도달했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무의식적으로는 수동적이고 마음이 허전한 데다 불안에 떨고 고립된 인간이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소외감과 권태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오늘날 술과 여행, 책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행복하지 않느냐고, 따분하냐고 물어보면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아니요, 완전 행복해요. 우리는 나날이 더 많이 여행하고 술 마시고 밥 먹고 물건을 사기 때문에 따분할 틈이 없어요." ... 불안하고 따분하고 소외감에 시달리는 인간은 강박적 소비로 불안을 보상하지만, 그 누구도 이러한 소비를 일반적인 질병으로, 더 정확히 말해 '정상성의 병리성'의 증상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말이다. ... 모두 같은 질병을 앓을 때는 질병이라는 개념이 의식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내면의 공허, 내면의 불안은 강박적 소비를 통해 상징적으로 치유된다.
56. 이 문제는 현대 서구 사회의 경제구조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완벽하고 절대적이며 계속 늘어나는 소비의 현실 위에 서 있는 경제구조 말이다. ... 20세기에는 돈이 없다고 해도 물건을 사지 않으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대출까지 해서 물건을 사고 여행을 다니니 말이다. ... 정리하자면 이 시스템에서 불안해지는 인간은 소비한다. 하지만 유혹당해 소비하는 인간은 불안해 진다.
57. 순전히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면 소비자는 이 모든 것이 완벽히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에게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감정을 선사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총애를 체스터필드가 아닌 말보로에, 말보롸 아닌 체스터필드에 선사한다. 바로 그 가자 선택틀 통해 가짜 인성이 된다. 그는 말보로를 피운다는 사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자기이며 인성이다. 선택의 행위를 통해 그는 권력을 경험한다. 사실 선택은 그저 그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영향의 결과일 뿐이기에 무의식적으로는 무기력을 경험하지만 말이다. 의식적으로는 선택했다고 믿ㅈ만 사실 그는 자신에게 제시된 여러 제품 중 선택하도록 부추김당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새루운 상황에서도 진정한 경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담배 상표는 사실상 모두 이해 관계가 동일하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상표를 더 많이 피우면 한 담배 상표의 대표를 더 좋아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이러한 선택의 행위에서 자유와 권력을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58. 당신이 자신의 대상과 함께 '젖는'지 '젖지 않는'지가 대상과 당신의 관계 차이를 결정한다. ... 자신으로 꽉 찬 인간은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줄 자유가 없다.
59. 중요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이다! ... 세상의 변화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다양한 해석이 중요한 것도 절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껏 이데올로기적으로만 인정했던 가치가 자기 인성과 행동의 강제적 동기가 될 정도로, 깊이 있는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60. 아리스토텔레스도....카를 마르크스도... 스피노자도... '활동성'을 우리 안에 깃든 정신력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표현이라 여겼다. 우리 안에 깃든 정신력이란 이성, 감정, 미의 감수성을 의미한다. 활동성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강요된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에게 깃든 창조적 힘엣 나오는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탄생하다는 의미다. ... 현대 산업의 의미에서 활동성은 분주함이다.
61. (활동성이란 행위에 대해) 산업 시대 이전 행위는 자유의 동기가 특징이었지만 현대적 의미의 활동성은 강제 동기가 특징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있다. ... 강제의 형태는 내적 강제이며... 내적 가제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바로 불안이다. ...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대체로 심한 곹포와 불안이 담겨 있다. 온갖 것이 다 무섭다. 자신이 불안하고, 삶이 무의미해서 겁나며.... 이러한 상황에서 불안에서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이다. ... 그저 분주하기만 하면 된다. 단 한순간도 고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다시 불안이 고개를 내밀 테니 말이다.
62. 외부의 강제, 대부분은 내면의 강제 때문에 자신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63. 우리는 많은 것을 예감하고 감지하며 안다. 물론 무엇을 아는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아는 것을 쫓아내는 데 사용한다.
64. 현대인은 매우 활동적이라 믿지만 실제로는 매우 수동적이다. 그의 활동성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지시하고 조종하는 활동성, 그에게 불어넣은 활동성이기 때문이다. ... (TV같은 것들을 예로 들며) 사람들을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들이마시고' 은연중 머리에 박힌 생각에 수동적으로 속박된다. 사람들은 뉴스를 '집어삼킨다.'
65. 나는 수동성을 의식하고 이 수동성이 인간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깨달음이다. 다음 걸음은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한번 가만히 앉아 바라보려는, 들어보려는, 명상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이건 절대 쉬운 과제가 아니다. 말은 정말 쉬워 보인다. 가만히 좀 앉아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그게 뭐 특별하다고,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 하지만 한번 해보면 당신이 얼마나 쉼 없는 행동의 강제와 분주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 멈춰선다. 바라본다. 멈추지 않으면 바라볼 수 없다. 이것은 한 개인만이 해서도 의미가 없고, 한 국가가 해서도 의미없다. 전 세계가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아야 한다. 전 세계가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이미 전 국가가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뒤쳐지면 국민의 삶을 질을 담보할 수 없다. 이는 정권의 연장이 불가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정치인 개인의 추락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 국가는 그러한 결정을 내린다하더라도 국민의 삶의 질을 하락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전 세계적으로 모든 국가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다면 모두가 합의한다면 가능은 하다. 변수 수백개를 한번에 통제해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강제를 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힘뿐이다. 아니면 강력한 재난이거나, 강력한 정신적 세뇌거나. 내 자신을 찾으려면 내 자신을 내어주는 선택을 먼저해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 개인단위에서 삶을 바라본다면 작가의 말과 생각들은 실현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확장시킬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그럼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만족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다. 남과 비교할 것 없이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다수가 될수록 점점 최적소비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선행된다면 후퇴하더라도(실은 다른 곳이 앞서가는 것이지만) 용인된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너무나 뿌리깊게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진 않은지 돌이켜보자.
내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 물질적 풍요가 아닌 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아보자.
이해하나 거부하게 되는 것이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알고 있으나 거부하는데 힘을 쏟는' 상황은 아닌 것인지 반성해보자
이래서 뒤로 갈수록 슬픈 감정이 들었나보다.
절망적이어서 슬펐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