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옛 말이 있다.
지금이야 기본적인 복지정책 덕에 굶어 죽는 사람은 없는 시대라지만 오래전부터 저런 속담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저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 죄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적지 않았나 보다.
장발장처럼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훔치거나 비바람, 이슬을 피할 곳이 필요해 돈을 훔치거나 혹은 감당하기 힘든 세금을 내지 못해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포도청에 갇히기도 했을 테다. 이들이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아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했을까? 양반, 혹은 귀족들이야 재산을 헤아리는 정도가 중요한 하루 일과였을지 몰라도 목구멍 문제로 포도청에 끌려간 사람들은 아마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쉴 새 없이 육체노동만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지금처럼 7일 중에 이틀을 쉬네, 반나절을 더 쉬네 하는 논쟁을 듣게 된다면 뭐라고 할까? 말 그대로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 대부분이 월화수 목금금 금을 보냈을 테니 말이다.
다행히 지금 나는 밥그릇에 끼닛거리 빌 걱정 없고, 달마다 정해진 날을 넘기는 일 없이 꼬박꼬박 렌트비를 잘 내고 있으며 돈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구를 걱정하는 마음에 물, 전기 적게 쓰기를 마음에 두고 있을 만큼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데, 그런데 난 왜 이렇게 일을 해야 하는 걸까. 게다가 이렇게도 하기 싫은 일을.
‘일하기 싫어 일하기 싫어’ 노래를 부르며 앞도 뒤도 궁금하지 않은 일을 끌고 가느니, 하고 싶은 일만 하면 안 되나.
햇볕에 구워져 식빵이 되어버릴 것 같은 사무실에 모자를 쓰고 앉아 일을 하느니 경치 좋은 공원 옆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는 건 어떨까. 향긋한 풀냄새 나는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앉아 자판을 좀 두드려봐도 좋겠다.
아침마다 침대인지 나인지 모를 몸을 힘겹게 떼어내는 대신, 자고 만큼 싶은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도 싶다.
뱃속을 뜯어내는 듯 아랫배가 불편한 아픈 마법의 기간에는 불편한 의자 대신 뜨끈한 방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 있으면 좋을 텐데.
비가 오는 날은 젖은 신발 속에서 축축하게 묵혀질 발가락 고린내 걱정하지 말고, 빵 굽는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창 밖 빗소리 구경과 함께 김치 부침개나 부쳐먹으면 딱이겠다.
생각만 해도 당장 사표를 내 던지고 싶을 만큼 행복한 상상들이지만 일에 묶여 있는 현실은 다르다.
공장 사람들을 상대로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닌 자재값을 한 푼이라도 더 깎기 위해 마치 이번만 잘 해내면 다음번에는 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마 어마한 오더가 올지도 모른다며 사기 아닌 사기를 쳐야 한다(절대 단언하지 않되 확신을 주게 말하는 스킬이 곧 경력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9시 전에 출입기록에 지문을 찍기 위해 옷깃을 여미며 빠른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머리가 아프면 타이레놀, 배가 아파도 타이레놀, 감기에 콧물이 줄줄 흐를 땐 쌍화탕에 타이레놀을 삼키며 책상에 엎드려 있더라도 컴퓨터로 우르르 쏟아지는 메일을 실시간 체크해야 한다.
달력 글자가 줄줄이 빨간 날, 남들이 다 휴가를 떠날 때 같이 떠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인지라 무섭게 올라버린 비행기 값, 호텔값만 새로고침을 몇 번씩 해대다 결국 집에서 삼겹살이나 구워 먹고 끝내는, 새로울 기억이라고는 없는 휴가를 몇 년째 보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충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지금까지 모아 둔 돈만으로도 몇 달은 돈벌이 없이도 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조금 먹고 조금 쓰면서 일 안 하고 살 수는 없을까? 적어도 그 몇 달만큼은 말이다.
아마도 나는 두려운 가 보다.
아직 먹이고 키워야 할 청소년 자녀가 둘이나 있는 40대 여자가 단지 일을 하기 싫다는 이유로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스스로 포기하고 집에 들어앉아 글을 쓰겠다면 세상은 문학소녀 나셨다고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다.
같이 백지장을 맞들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백지장 위로 올라타버리면 남편은 혼자 얼마나 힘이 들까.
나를 세상에서 제일 잘난 딸로 알고 계신 우리 엄마는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부터 내가 혹여 죽을병이라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일 밤잠을 설치 실 테지.
아무도 내 글이나 그림을 찾지 않아 결국 나의 창작물이 공개적으로 쓰는 일기 정도에 그치게 된다면 나는 매달 돌아오는 공과금, 집세를 걱정하며 다시 새로운 직장을 기웃거리게 되진 않을까. 불러만 주시면 어떤 일이든 다 하겠다며 더욱 충성스러운 노예가 된 채 말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이런저런 걱정보다 마흔 너머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여자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걱정을 싹 가시게 할 만큼 열심히 변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내 나름의 두터운 결심이 아닐까.
취미가 일이 되면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된다지만 돈을 벌기 위해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삶을 즐기기 위해 해 나가는 일.
내가 나를 인정하기 위해 하는 일.
시작이 설레고, 과정이 즐겁고, 그다음이 기대되며 끝이 보람찬 일.
일 년 뒤, 다시 내게 묻겠다.
왜 일을 하는가.
그리고 그때의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너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