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부탁드립니다.
대학 졸업식도 마치기 전, 신입사원다운 까만색 정갈한 정장을 입고 첫 출근을 한 것이 꼭 20년전. 시간으로만 가늠해 보면 나는 닳고 닳은 경력사원이다.
특이하게도 직장 생활 중 많은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고, 아직 직장 생활을 계속 하고 있는 까닭에 한국과 중국에서의 직장 경험을 고루 갖춘 경력직원으로 잘 살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나 스스로도, 나를 보는 사람들도. "무엇이든 가르쳐만 주십쇼" 라는 생각으로 볼펜과 노트, 그리고 초롱 초롱한 눈만 준비하면 "아무것도 몰라요"가 통하던 신입사원 모드는 아니지만, 어디서나 배워서 성장하자 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고, 적지않은 이직중에도 큰 어려움이나 시끄럼없이 업무를 처리하며 어디서나 볼수 있는 흔한 "부장"이라는 직책까지 자연스럽게 목에 걸었다. 높든 낮든 직급이라는 것이 딱히 벼슬 같지는 않지만, 어디서든 내가 앉을 자리를 알려주는 일종의 이름표 같은 도구라 생각하면서. 그래 난 보통의 부장, 보부장이야.
얼마 전, 내 의지와는 조금 다르게, 이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회사의 사업 축소로 인해 정리해고를 당한 것이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슬프거나 하는 감정은 전혀. 오히려 "좋아, 이 기회를 이용해서 이제 직장생활 그만두자, 내가 하고 싶은일 하는 거야! 충분히 일 했어 "라는 생각으로 한참을 들떴었다. 내 시간을 내가 관리하는 게 진짜 부자라며, 이제 현금 부자가 아닌, 시간부자가 되어, 진짜 부자로 살겠노라며 몸도 마음도, 그리고 생각도 공중에 붕 뜬채 한참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너무나 멀더라니. 중학교에 막 입학한 큰 아이 교육비부터, 아직까지 잡지 못했지만 지금이 마지막으로 기회라며 얼떨결에 갖게된 "상해 집주인"이 되기 위한 대출금이며, 계약기간마다 오르는 월세, 하다못해 작년보다 두배로 뛰어오른 돼지고기 값까지..... 내가 매달 누군가에게 열어주어야 할 지갑이 크게 입을 벌리고 내게 물었다. 진짜 수입없이 살 수 있겠어?
결국 남편과 나의 어깨에 얹어진 짐을 그에게만 넘길 순 없었기에 난 조심스럽게 새로운 직장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어깨의 짐은 흔들리지도, 가벼워지지도 , 혹은 더 무거워 지지도 않았고 난 내가 서있어야 할 땅으로 조심스레 두 발을 옮겨왔다. 새로운 직장 어때? 라는 주변의 질문에 '적응은 개인의 자질 문제지, 난 어디서든 내 능력 잘 발휘할 수 있어'라는 오만한 생각이 날 코웃음을 치게 만들었다. "훗, 괜찮겠지뭐, 적응이야. " 쉬운 대답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땅이 나를 흔들어 놓을 것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혀 다른 마인드의 경영진들 , 낯선 업무처리 방식, 새로운 업무들, 그 와중의 텃새와 밥그릇 챙기기...
새로운 직장에서 적응할때의 스트레스가, 배우자의 죽음을 맞이 할 때와 맞먹는 강도라더니 온 몸이 절절하게 느끼는 중이다.
내가 이 곳에서 억지로 어떻게든 내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를 잡게 될지, 혹은 결국 이직 전에 고민했던 "내 시간을 다스리는 자"로 마무리를 하게 될지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사십춘기 같은 이 혼란스러운 시간을 글로 혹은 그림으로 새기며 내가 걸어야 할 길을 글자로 따져보고 싶을 뿐.
그래서 나는 다시, 닳고 닳은 신입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