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고 지금은 또 이렇죠
이직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면 흔히 돌아오는 질문.
"그전 회사는 왜 그만뒀어? 그 때를 생각해봐."
잘 다니던 회사를 뭣하러 때려치웠냐라고 묻는 듯한 표정과 함께 말이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다니던 회사였으면 그만둘 이유도 없었겠지만 사실 몇 번의 이직을 돌아보자면 "탈없이 잘 다니던 회사"를 내 감정적인,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그만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중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것은 ,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서 일을 더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동복계의 명품이 된 그 회사는 중국의 생산력을 빌리기 위해 현지에 정식으로 뿌리를 내리는 대신 약 5년여의 시간 동안 그저 중국과의 업무를 지속할 수 있는 튼튼한 통신선을 놓고 철수를 하는 정책을 썼었다. 내가 주재원으로 발령받은 지 3년쯤 후, 회사에서는 내가 다시 서울에서 일을 해주길 바랬고, 한국 사람과 결혼을 하긴 했지만 중국에서 내 가정까지 가지게 된 나로서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이 "싫은데요? 그럼 그만둘게요" 하고 가벼이 사표를 냈더랬다. 당시에는 딱히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뭘 하든 하면 되지 라는 젊은 시절 누구에게나 가슴 빽빽히 갖고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덕에 직장이 없는 내 모습에 대한 걱정은 전혀 되지 않은 과거의 나였다.
한국에 계시던 여러분께 전화로 사직 인사를 드리던 마지막 날, 나를 직접 뽑아주신 임원 한 분이 "미안하다"라고 하셨다. 그때는 내가 회사의 결정을 내 의지로 따르지 않은 건데 왜 나에게 미안해하시는지 의아했다. 지금 생각건대, 나보다 오래 삶을 겪어보신 그분은 직장을 잃은 내가 걱정되셨던 게다. 매달 보통의 삶을 가능케 하는 기름 같은 월급이 없어졌으니, 이아이가 얼마나 힘들까 하셨나 보다. 그 임원분의 나이 즈음이 되어보니, 그 걱정스러운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긴 하다.
그 뒤로 이어진 몇 번의 사직은 경영진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인한 것이었다. 사장님의 이러한 생각이 절대적으로 맞지 않아서, 사장님의 이런 경영원칙이 잘 못 되어서, 회사의 이런 행위는 윤리적으로 옳지 않아서. 말 그대로 회사를 "때려치웠다". 지금 생각하면 오만하고 어리고 무엇보다 너무나 주관적인 판단이었다. 물론, 법을 어겨 처벌을 받을 정도로 문제가 되었던 회사의 결정도 있기는 했지만 회사를 키우고 끌어온 경영진 나름의 노하우나 정책, 생존 능력이 있었을 텐데 그들이 틀렸다며 공개적으로 혹은 험담으로 비난을 쏟아낸 건 나 스스로에 대한 잘난 체 정도밖에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내가 떠나온 회사들이 아직도 나름 건실하게 존재하고 있는 걸 보면 내 판단이 잘 못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회사의 방향과 맞지 않는 생각으로 업무를 보아봤자 어떻게든 즐겁게 일 할 수 없었을 테고, 적어도 나나 조직에게 발전은 없었을 테니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때의 유치한 잘난 척이 조금 부끄럽긴 하다.
가장 최근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것은, 말로만 듣던 정리해고였다. 사실 회사의 자금 상태가 불안했다거나 문을 받아야 할 만큼 사업환경이 어려운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내가 하던 일이 사장님의 회사 내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는데 사장님께서 일선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비추셨고,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업무 흐름을 보아 언젠가부터 이 조직에서 내 자리가 조금 무거울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터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진행된 해고 혹은 사직이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그래도 회사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회사를 그만둘 핑계를 찾던 터였고, 해고라는 모습이 조금 껄끄럽긴 했지만 결국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 회사를 다니면서도 퇴직을 하게 되면 괴팍스러운 사장님에 대한 만화를 연재해 베스트 작가가 되겠노라 할 정도로 회사에 불만이 많았지만 그래도 회사와 나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다. 자연스러운 퇴직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졌던지라 업무 정리 기간이 두 달이 넘었고 나도 이 회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완벽히 끝내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마무리를 지어, 정리해고라는 이름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지만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었다.
그리고 지금 , 아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어 든 것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새로운 회사에 나는 적응을 하지 못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또다시 때려치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숨 쉬듯 하고 있다. 새로운 직장에서 적응이 어려운 건 다 겪는 문제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 퇴사를 고민하는 이유는 이전과 정말 다르다. 회사에 대한 내 얄팍한 판단에 비추어 보아 이 회사가 잘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닌, "혹시 내가 문제가 있는 사람일까?"라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 내 태도의 옳고 그름까지 곱씹어 돌아보게 되는... 내가 잘 못된 이유라면 나를 깎고 다듬어 조직에 몸을 맞춰야 할까? 그러기엔 나는 여기저기에서 닳고 닳아버렸고, 이미 그렇게 둥글어진 나를 새로 깎고 맞추느라 신체적 , 정신적인 고통도 여기저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럼, 새로운 조직과 구성원의 문제라면, 그들에게 변화를 요구할 수 있을까? 그냥 내가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이유는 다르지만, 늘 그랬듯 홀가분하게 "싫은데요? 그럼 그만둘게요"라고.
사직서를 가슴에 품기에는 아직 노동계약서의 잉크도 마르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사회 초년생도 아니고 첫 직장생활 이후 20여 년이 흘렀는데 이제 와서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 문제로 고민하다니. 정말 닳고 닳은 신입사원이라 불릴만하지 않은가. 나는 이대로 노동계약서를 찢어버려야 할까 아니면 여기저기 마음이 찢기는 고통을 감내하며 나를 이곳에 맞춰가야 할까.
집에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밖에는 태풍이 무섭게 불고 있다. 시험을 앞둔 중학교 2학년처럼, 태풍 때문에 내일 다들 회사도 가지 말고 집에만 납작 엎드려 있으라는 특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