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안 나빠요. 내가 사장이 아닐 뿐
퇴근길, 전동차로 쌩쌩 길 막힘 없이 달리던 중, 앞에서 자전거로 나란히 길을 달리던 두 사람 때문에 어지간히 진로방해를 받게 되었다. 둘은 퇴근길 속의 분주함과 자전거의 속도감 속에 서로 목소리 높여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마침 신호 정지를 하게 되어 난 진로방해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듯, 그리고 이 참에 그들을 앞질러 갈 생각으로 그 두 사람 곁에 조금 위협적으로 멈춰 섰다. 그러나 내 곱지 않은 표정과 위협적인 멈춤에도 신경 쓸 틈 없이 계속해서 둘이 나누는 얘기인 즉, 그들의 사장님에 대한 불만이었다.
"회의 시간에 사장님 하는 얘기 들었지? "
"사장님은 너무 간단하게 생각해. "
"사장님 그 생각 틀렸어. 그게 그렇게 안된다고." 등등
이제 갓 졸업을 한 듯 어린 용모와 옷차림의 둘은 서로의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내가 너보다 더 답답하다는 표정과 말투로,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사장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마도 평소 사장님에 대한 생각이 오늘 그들의 어떤 회의 중 어떤 계기로 인해 터져 나온 것이겠지. 혹은 평소 표현을 못하고 있던 터에, 생각이 비슷한 동료를 만나 말문이 막 터졌는지도.
나 역시 당시 회사 자체보다 사장님에 대한 불만이 잔뜩 쌓여있던 터라 그래 그 맘 다 이해한다 하며 초록불과 함께 그들을 지나쳐갔다. 중국 사람들도 라오반을 다 좋아하진 않는구나 하면서.
그리고 며칠 뒤, 동료들과 점심을 마치고 식당에서 나오는데 건물 앞에 서있던 두 한국 남자분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사장님 메일 봤어? 말을 해도 참 "
"그러게 상황 다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뭐. 참 나 "
연기가 매운 듯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뻐끔뻐끔담배를 태우며 그들은 사장님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고 있었다. 어른에 대한 높임말 따위는 간단히 무시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직급보다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국 사람들도, 조직 생활의 체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도, 이제 막 회사에서 주어진 일만 해야 할 것 같은 젊은 사람도, 어느 정도 회사 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회사의 결정을 이해할 법한 나이가 지긋한 사람도 사장님에 대한 불만은 동일한 가 보다. 밖에서 동료들과 사장님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내 모습도 비슷할까 하는 생각과 함께 사장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소기업에서 여러 번의 이직을 거친 나는, 현재의 회사로 옮겨오기 전 직장부터 사장님과 긴밀하게 협의하며 일을 진행하게 되었다. 직책이 달라진 까닭도, 이직하는 회사의 규모가 점점 작아지며 상사가 없었던 까닭도 있다. 그래서 사장님이라는 직책을 옆에서 잘 관찰하고 이해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도 길어지게 되었는데 현재 직장의 사장님과 이전에 그만둔 회사의 사장님은 참 다른 성향을 갖고 계셨다.
마지막 회사의 사장님은 독재자 같은 분이셨다. 개인적인 성격도 특이하거니와, 본인의 생각이 워낙 강하셔서, 거의 모든 일을 본인의 논리대로만 진행하는 방식에 대해 직원들의 불만이 많았다. 특히 돈과 관련된 일에 엄격한 기준을 두고 일을 하셨기에 직원들은 돈과 관련된 일에 대해 사장님과 업무 보기를 힘들어했다. 사장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관리며, 금액과 관련된 일을 하던 나 또한 사장님의 무리한 업무 방식을 받아들이기도, 직원들이나 거래처의 불만을 받아내기도 너무 힘들었었다. 그래서 업무의 절대량은 많지 않았지만 늘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사장님 때문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밖에서 보이는 사장님의 모습 또한 평범하진 않았기에, 내 불평을 듣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공감해주곤 했다. 물론, 회사 밖에서 회사 사람과 관련된, 특히 사장님에 대한 불평을 얘기한다는 게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디에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넘치고 흘러서 내가 다 망가져버릴 것 같았기에 나로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속닥거리기라도 해야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직장을 찾으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의 하나는 존경할 만한 인품을 가진 어른을 직장 상사로 두는 것이었다. 마침, 면접 자리에서 처음 뵌 (지금 내가 함께 일하게 된 ) 사장님은 한 눈에도 인품이 훌륭해 보이셨고 사람을 괴롭히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지금의 회사를 선택하는 것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해야 할 일 대부분이 사장님과의 소통을 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독단적이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으시는 어르신과 오래 일을 한 탓일까. 첫인상대로 , 예상했던 대로 인품이 훌륭하신 지금의 사장님은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못하신 까닭에 박힌 돌과 굴러온 돌 - 기존 직원과 나 사이에 정확히 선을 그어주지 못하셨다. 그리고 최종 결정권자로서 중요한 일에 대한 결정을 하긴 하셨지만, 직원들을 얼르고 달래어 허락을 받듯 일을 진행하시는 경우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직원들이 사장님 곁에서 불평을 크게 하기도, 그걸 듣고도 모르는 척하시기도 하는 상황을 보며, 차라리 조금은 엄하거나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이 더 결정권자라는 직책에 어울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집쟁이 사장님 덕분에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이젠 주도권이 없는 사장님이라니. 둘 다 힘들긴 마찬가지구나.
그런데 결국 어쩌면 어딜 가든, 누구와 일을 하든 계속 겪어야 할 상황일지도 모른다. 내가 내 일을 내 뜻대로, 내 손익 상관없이 판단 내리지 않는 이상, 당연한 일 아닐까. 내 가족과도, 내 아이들과도 매일 다른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데 하물며 내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직장에서 내 머리 위 최고의 상사를 이해하고 뜻을 따르는 것이 쉬울 리가 있나. 그리고 몇 번의 이직과 독특한 사장님들 가까이에서 일을 하며 느낀 것은 동네 슈퍼라도 사장은 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분들은 크던 작던 자기 생각으로 일관된 방향으로 회사를 끌어오셨고, 수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하셨다. 게다가 아직도 그들의 회사는 건재하고, 그 덕에 매월 몇십 명의 가족들이 생활을 꾸려가고 있지 않나. 위법을 하거나 나를 인격적으로 비하하지 않는 한, 사장님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나와 다른 의견은 그저 의견일 뿐. 그리고 이 회사에서는 사장님의 역할이 가장 크기 때문일 뿐. 모든 책임은 결국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의 몫이니까.
나는 오늘도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이불속에서 남편에게, 커피잔 속 친구에게, 핸드폰 속 엄마에게 속닥속닥 소리치며 스트레스를 날리는 중이다. 그리고 대화의 끝은 언제나 동일하다.
"싫으면 내가 그만둬야지 별수 있나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