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는 오지 않는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나는 내 인생에 대한 일종의 지도를 가지고 살았다.
중학교 때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기억되는 각종 이름의 시험과 그 결과물이 내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내게 알려주었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정갈한 글씨로 등수와 수우미양가 등을 기록해주신 성적표가 탐구생활과 함께 지급되었고, 고등학교 시절 매달 모의고사가 끝난 후에는 가장자리에 규칙적으로 뚫린 작은 기계 구멍들과 회색빛의 디지털 글씨가 "이 성적표의 내용은 정확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성적표(감히 칼과 연필 따위로는 조작도 할 수 없다)가 날아왔다.
전교 1등이건 꼴찌이건 성적표를 받아 드는 태도와 속도는 다르지 않았다. 누가 볼세라 성적표를 낚아채 듯 받아 들고 나만의 구석자리로 옮겨가 손가락 틈 사이로 굳이 굳이 이번에 확인된 나의 위치를 어렵게 확인하곤 했다. 그 숫자를 보면서 회색 바닥과 벽만큼 차갑던 교실, 혹은 내가 속해있던 마산(내가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마산시는 고교 평준화가 이뤄지지 않아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재수를 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경상남도 혹은 전국 어디의 어느 쯤에 내가 서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줄을 상상해가며, 나를 억지로 그 숫자에 맞춰 줄을 세웠다. 대학 진학 이후, 종이 인쇄물도 없이 그저 메일 공지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학점 또한 그것으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내 위치에 대해 나는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엄마가 보았다면 비싼 등록금을 감안하여 배신감을 끝없이 느꼈을 테고 객관적으로는 기숙사에서 쫓겨날 점수였지만.
성적표의 점수는나 등수는 내 자존심, 가끔씩은 엄마의 자존심을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도구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적표는 내게 어디엔가 확실히 소속이 되어있다는 안정감을 주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모의고사부터는 전국에서 내 점수가 속하는 범위를 %로 분석한 까닭에 그 위치를 소수점 자리로 까지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줄을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누구와 함께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채 , 그저 내가 이 숫자 위에 들어가 있구나. 내가 어디론가 가고 있구나.
그래서, 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길을 잃었다.
취업을 하는 것이 사회에 소속을 하는 의미라면 사회인이 된 후에도 나는 이전처럼 한 달에 한 번씩 아니, 그때보다 더욱 정기적으로 정해진 날자에 성적표 같은 월급 명세표를 받았다. 취업난에 지레 겁을 먹어 중소기업에서 일을 시작한 까닭에 남들보다 한참 적은 급여를 받았던 나는 그 숫자가 나를 표현하는 성적표인 것 같아 속이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 급여가 나의 성과를 평가한 결과가 아니라 이 회사가 속한 산업에 따라, 내 나이에 따라, 혹은 결혼 유무 등의 사회적 기준에 따라 임의로 바뀔 수 있는 숫자라는 것을 알았다. 온전히 내 노력을 대변하는 숫자도 아니었고 , 그 숫자에 따라 줄을 선다 한들 그게 내 자리도 아니었다. 통장에 , 명세서에 찍인 숫자는 내게 소속감을 주는 숫자와는 다른 것이었다.
굳이 숫자라는형식을 떠나 생각하자면 내게는 몇 번 직장이 바뀌는 동안에도 내 이름과 소속이 찍힌 명함이 늘 주어졌고 지금도 나는 검은 바탕에 화려한 광택을 자랑하는 멋진 명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자리를 떠나는 순간 이 명함 또한 그저 어떻게 분리수거를 해야 하나 고민거리의 대상일 뿐, 내게 나의 위치를 알려주는 좌표가 될 수 없었다. 가끔 내가 잘 살아가고 있나 내 삶에서 나는 몇 점일까 내 점수가 궁금했지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점점 사라져 갔다. 그렇게 나는 삶에 대한 내 성적표를 받지 못한 채 친구들과 재미로 하던 얘기 그대로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불러대며 몇십 년을 살아오고 있다.
중간고사를 망친 아들녀석 성적표를 받아들고 한참 열을 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성적표를 기다리던 어릴 적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내 아이들을 통해 내 자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마치 아이들이 내 인생을 다시 살아주고 있는 것처럼, 내 어린 시절의 아쉬움을 아이들에게서 메울 수 있을 것처럼. 매달 새로운 성적, 나아진 내 모습을 기대하며, 아이들을 채찍질하며 말이다.
이런, 점점 여간해선 보기 힘들어지는 아들 녀석 성적표를 훔쳐보지 않으려면 다시 학교라도 다녀야 하나.
아니면 아쉬운 대로 점수가 찍힌 성적표를 받을 수 있는 토익 시험이라도 응시해 봐야 조금은 덜 불안해질까.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성적표를 기다리며 살아왔구나.
공부만 잘하면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다던 어른들의 말에 그렇게 길이 들어버린 채로 어른이 된 후에도 성적표를 기다리면서, 거기 쓰여있을 숫자들을 걱정하면서, 혹은 기대하면서. 누구도 내 인생을 평가해 줄 사람은 없는데 난 누구의 평가를 기다린 걸까. 어른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나 보다.
스무 살은 족히 어린 사람들에 섞여 쓸데도 없을 토익시험을 치거나 서랍을 뒤져 숨겨진 아이들의 성적표를 찾아 헤멜 일이 아니지 싶다. 누구도 내게 내 인생의 점수나 성적을 가르쳐 줄 수 없고 내가 있는 자리를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내가 알아야 하고, 원하는 내 자리를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원하던 등수, 성적을 걸어놓고 열심히 책을 보던 그때처럼, 비록 숫자로 나타낼 수는 없지만 내 마음에 비바람이 들지 않아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곳, 열심히 달리기를 하다 가끔 다리를 펴고 앉거나 비스듬히 드러누워도 앞 뒤로 줄 선 사람들에게 눈치 봐야 할 줄이 없는 그런 곳으로 걸어가야 한다.
더 이상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사람들 사이에 줄 서있음에 안도하지 말기를. 숫자위에 서서 나를 바라보지 않기를.
눈을 떠보니 홀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더라도, 눈에 보이는 곳이라고는 어둡고 무서운 섬 하나 일지라도 두려움 없이 내 지표를 찾고 그곳을 향해 걸어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