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직, 목구멍은 포도청

스트레스 모집 중입니다

by 보부장

나는 하얀 피부를 가졌다. 피부가 어쩜 그렇게 희냐고 사람들이 물어보면 우리 엄마에게 물어보고 알려드리겠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엄마에게서 받은 피부가 동양인의 평균 피부 색깔보다는 희고, 또 다행히 곱기도 했다. 다행히 사춘기를 겪을 때도 여드름이 없었지만 그 나이 때 여자 아이들이 그러하듯 조그만 흠이라도 보일라치면 굳이 손톱으로 긁어내어 부스럼을 만들곤 했다. 틈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 보고 어디 손톱으로 시원하게 짜낼 곳은 없나 자세히 살폈다. 다행히 자체 재생력이 좋았는지 새 살이 돋아나 다시 자리를 메워주고 피부는 깨끗한 모양 그대로 지금까지 "얼굴이 하얗고 부잣집 딸" 같던 내 이미지를 잘 유지해주었더랬다.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일찍 시작한 월경은, 뱃속에 아이 둘을 안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정해진 시간에 찾아왔다. 늦어봤자 하루 이틀, 빨라봤자 역시 하루 이틀. 늘 감기나 기침을 달고 골골거리면서도 내 몸에 특별한 문제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한 것도, 반갑지 않지만 또 반가워해야 할 그 손님이 정해진 주기에 맞춰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변화가 찾아왔다.



언젠가부터 턱 언저리부터 시작하여 뾰족하게 아픈 종기 같은 여드름이 생겼다. 흔히 여드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그렇듯 끝이 노랗게 익어 올라오면 톡 터뜨려주는 맛도 시원하긴 한데, 며칠 동안 욱신 욱신 아프기만 하고 끝이 영글지도 않다가 결국 벌겋게 성이 난 채로 화산처럼 부풀어 올랐다. 블랙 헤드 건 작은 트러블이건 가만 두고 못 봐주던 내 성격상 여기쯤이 분화구겠거니 생각하는 부분을 바늘로 쿡 찔러 터뜨려보려 하지만 여간 깊은 곳에서 곪은 것이 아닌가 보다. 바늘 공격을 받은 화산은 오히려 주변 세포를 부풀려 꽉 움켜쥐고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그러기를 며칠 째, 결국 바늘과 손톱으로 인한 상처에 같이 곪아 버린 분화구가 터지면 피가 잔뜩 난 후에야 조금씩 아물어 들어갔다. 남는 건 붉은 흉터. 보기에 영 편치 않다.



문제는 한 두 개,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것이다. 턱 언저리에서 시작된 종기 같은 여드름들은 귀 뒤쪽으로, 목덜미로, 양 쪽 관자놀이와 눈 사이 그 좁은 공간에도 두둑 두둑 자리를 잡았다. 위치로 보아 임파선 언저리에 문제가 있겠구나 의심이 들었다. 피부과도 가보고 피부에 좋지 않다는 매운 음식도 끊어봤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리 잡기 좋은 피부라는 소문이라도 늘었는지 점점 그 수는 늘어났다. 말로만 듣던 성인 여드름인가... 각 분야 전문가들이 온갖 경우의 답을 시시각각 내놓는다는 지식 코너도 훑어보았지만 원인을 모르겠다.



또 다른 고민도 생겼다. 보기 싫은 여드름이 생겼다며 징징거리는 정도로 입을 삐죽거리고 지나기엔 좀 심각한 문제였다. 건강 앱에서 알려주는 “생리 가능일입니다” 소식에 맞춰 꼬박꼬박 찾아오던 손님이 갑자기 소식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인간관계 세상에서 제일 잘 써먹는 위로는 이곳에선 통하지 않았다. 처음엔 한 이주가 넘도록 소식이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래간만에 임신 테스터도 구매했다. 하지만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더니 하늘 볼일 없었던 나는 역시나 별을 딸 일 또한 없다는 결과를 확인했고 늦게나마 손님이 찾아왔다. 생각보다 비쌌던 테스터 비용은 홀랑 날렸지만 따지 못한 별은 아깝지 않았고 찾아온 손님은 반갑기만 했다.

그다음 달은 더 늦어졌다. 게다가 이전까지 생리 전 증후군으로 가슴이 조금 부풀고 허리는 뻑적지근 굳거나 오슬 오슬 한기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턱 언저리 여드름만 더 빽빽이 자리를 잡을 뿐, 달리 전조증상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상황이 조금 심각하다 생각된 나는 병원을 찾아 초음파도 해보고 왠지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경부암 검사도 해보았지만 물리, 화학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단다. 결국 생활 건강 뉴스에서 익숙해진 이름의 호르몬제를 잔뜩 처방받았다.


이런 경우에 가장 좋은, 그리고 건강상으로 어느 문제에도 대답 가능한 해결책이 있긴 하지.

“스트레스를 줄이세요”


결국 한약방을 찾았다. 어떤 이유로든 자궁벽에 착착 쌓여있을 생리혈을 떼내는 일이건 난포에 갇혀 있을 난자들을 출동시키는 일이건 호르몬제는 왠지 내 몸을 협박하는 것 같아 맘에 들지 않았다. 한약에 녹아든 재료들이 내 몸을 살살 달래고 어루만져주길 바랬다.

‘미안하대. 얘가 좀 더 신경 쓴대. 얘도 그러긴 싫은데 어쩔 수 없었다잖니. 이제 좀 제자리로 돌아가서 지켜보자’라고 대신 좀 전해줄래.


오래간만에 중국인 선생님이 진료를 봐주는 중국 한약방을 찾았는데 역시나 스트레스로 인한 내분비계의 문제란다. 그래서 임파선을 따라 종기 같은 여드름도 계속되는 것이라고. 맥을 짚어 보아하니 가슴 쪽으로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새롭지만 반갑지 않은 소식도 전해주신다.

잘 달랠 수 있는 재료들로 부탁드려요.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주일에 한 번씩 진료를 받고 몸 상태에 따라 최소 한 달은 복용을 해야 몸이 좋아질 거라고 한다. 정신을 못 차리는 내분비계가 정리된다는 뜻일까. 선생님의 말을 듣자마자 어김없이 머릿속으로 약값이 먼저 계산된다. 적은 돈이 아니다. 길을 잃고 헤매 다니는 내 몸속의 호르몬들을 칼도 대지 않고 제 자리로 돌려주겠다는데, 그럼. 이 정도 돈은 들겠지. 그런데 참 싫다. 몸이 병드는 걸 알면서도 병의 원인인 일을 그만둘 수 없다니. 약값이 많다 해도 급여보다야 당연히 적을 테니 이대로 스트레스에 공격받는 몸을 달래 가며 일을 해야 한다니. 나중에 또 내분비계에 문제가 오면, 그때는 조금 더 비싼 약으로 혹은 긴 시간 동안 복용으로 급여만큼 약값을 지불해야 할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더니, 먹고살기 위해 위법을 할 일은 없으리라 믿지만, 목구멍이 각종 병의 발원지, 감염지쯤은 되겠지 싶다.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니. 언제쯤 이 등가 교환의 법칙을 무시하고 생활 걱정 없이 직장을 그만둘 수 있을까. 적게 먹고 적게 쓴다 치면 지금껏 노력한 돈으로 먹고살 만은 할 것 같은데, 이미 내 생활이 내 개인의 것이 아닌지는 오래이다. 어쩔 수 없다. 하루 종일 조직 사이에서 눌린 압박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스트레스도, 작업복을 벗 듯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두고 퇴근하는 수밖에.



333.jpg



입에 닿은 한약이 유난히 쓰다.

몸을 보하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유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쓴 약을 먹는다는 핑계로 과자라도 한 움큼, 달달한 사탕이라도 한 통, 오히려 약보다 더 많이 준비해두고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냥 꿀떡꿀떡 한입에 들이켜 버렸다. 마흔 넘어 인생에 처음이었다. 내가 이렇게 쓴 약을 감초 하나 없이 마셔버리다니.

입안에 아직 꾹꾹 혀를 눌러대는 쓴맛이 느껴지는 걸 보니 짠맛에 둔감해진 엄마처럼 미뢰 세포가 퇴화한 것도 아닌 듯한데.

잠깐 "으른"이 된 걸까 싶었지만, 한약 한 컵을 호들갑 없이 마셨다고 이런 비장한 기분이라니,

역시 아직 멀었나 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제 점수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