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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정실 Jun 05. 2020

02.인생에서 한 번쯤 스페인으로

제2부. 스페인에서의 271일을 회상하다


한 번쯤 살아보자

삶 자체가 달달한

스페인에서!



스페인은 듣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지중해 날씨를 가진 스페인, 여름엔 밤 11시, 겨울엔 9시가 되어야 해가 지는 나라다. 40도를 웃돌지만 건조한 여름 날씨는 늘 뽀송뽀송하고 잘 말린 옷감의 바스락거리는 촉감을 안겨 준다. 도대체 꾸물꾸물하다는 표현은 어울리는 날이 하루나 있을까. 하와이안 블루 색을 띠고 있는 하늘 덕택에 우울함이라곤 자리할 곳이 없다. 벤치에 앉아 커피 한잔을 사이에 두고 너끈히 서너 시간 수다를 떠는 남자들의 마음 또한 결코 날씨와 무관치 않다. 어느 누가 이 날씨에 찌푸릴 수 있단 말인가. 태양은 삶의 질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시간 쪼개기의 달인인 나를 나무늘보처럼 늘어지게 만든 결정적인 것은 바로 '식사시간’이었다.

오전 9시쯤 가벼운 아침은 오렌지 주스와 크루아상으로. 오전 10시 30분쯤 본격적 아침은 바(Bar)에서 삼삼오오 이루어진다. 야채와 계란을 넣어 만든 토르티야,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소스를 듬뿍 바른 바게트에 커피 한 잔이면 아침이 완성된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걸출하게 맞는 점심은 수프, 와인을 곁들인 스테이크, 감자튀김, 달달한 디저트의 풀코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칼로리 따위 의식치 않는 듯하다. 몸과 마음까지 살찌우는 행복한 점심이랄까.

그럼 저녁은?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들의 저녁 시간은 만끽한 점심의 소화 시간을 감안하여 저녁 8시부터 시작된다. 일반 식당들도 8시는 되어야 문을 연다. 저녁을 먹고싶다고 아무 식당에나 가서 메뉴를 주문하려 하면 “아직 오픈 전이에요. 우린 휴식 중이거든요. 8시까지 기다리셔야 해요.”라는 거절을 심심찮게 당할 것이다. 그들의 저녁은 오후 8시부터 맥주나 와인과 함께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진다.

늘 저녁만큼은 가족과 하는 스페인에서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소문난 애처가 남편들도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스페인은 요리도 남편의 몫, 육아도 남편의 몫이니 말이다. 자상함으로 치면 절대지존이다.


식사 공간 자체가 가족과 함께 하는 소통의 공간인 덕에 이들의 저녁 풍경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조금 보태서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20분간 꾸역꾸역 음식물을 위장에 넣기 바쁜 우리의 식습관 문화와 비교해 볼 때 그들의 식사 문화는 예술에 가깝다. 풍경을 떠올려보자. 마치 특별한 날인 양 수프를 끓이고 오븐에 구워낸 풍미 가득한 스테이크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공유하며 한껏 즐기는 그들의 모습을.


1년 연중 축제로 도시의 달뜬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는 나라다. 발렌시아의 라스파야스 축제, 토마토 축제, 빰쁠로나 지방의 소몰이 행사인 산 페르민 축제, 성 이시도로 축제 등 축제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 졸업이 유예 된다는 나라가 바로스 페인이다. 어릴 적 꿈이었던 스페인 어학연수를 떠나왔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내게 이곳은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도피이기도 했다.


설령 도피라 해도 그런 것 따위는 중요치 않다. 어찌 되었든 나는 결론을 내리기를 ‘도피’라는 말을 쓰기에 스페인은 너무 환상적인 나라라는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나라로의 도피라니, 그 어떤 은유라도 적절치 않다.

수동적인 직장생활 가운데 한 번쯤 내가 오롯이 선택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시대가 좋아져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고 일과 삶의 밸런스를 맞추며 흉내 내보지만 잔무에 주말을 반납하는 직장인들에게 질적인 삶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이야기이던가.


먼 이야기이지만 먼저 퇴사한 선배들의 삶을 보며 학습해 왔다. 마흔이 넘고 쉰을 넘기면서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삶의 아이콘들을 하나 하나 눌러가며 회한에 젖으며 살아가는 선배들을 보며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그래서 대기업 억대의 고액 연봉을 포기하고 이르디 이른 나이에 퇴사를 선택했는지 모른다. 특히 퇴사 몇 년 전, 선배들은 혹독한 바깥 세상을 삼 개월만 경험하고 나면 뼈저린 후회를 할 것이라며 나의 어학연수나 ‘해외 살이’를 치기 어린 스무 살내기의 그것처럼 취급했다. 그럴 때마다 오기가 생겼다. 용기보다는 조언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남과 다른 삶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공감받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문화에 염증을 느낄 때마다 더욱 더 떠나고 싶어졌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내 나라 사랑이 유별난 사람이 ‘나’ 다. 유대인을 뛰어넘는 민족은 대한민국 민족 뿐이라고 다이내믹 코리아를 외치고 다니는 대한민국 예찬론자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뭐, 내 나라라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떠나 온 스페인이다.


그런데,

이곳에 나의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Oh, my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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