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이들에게 수행평가 결과를 알려주었다. 역시나 만족스러워하는 아이들과 속상해하는 아이들로 희비가 교차했다. 이제 겨우 초등학생 티를 갓 벗어난 중학생이 점수 하나하나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교육 현실은 늘 안타깝다. 교육의 결과가 평가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데, 이런 날이면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다. 내가 아이들의 미래를 발목 잡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수업이 마치고 교실을 나설 때였다. 어떤 아이가 말했다.
“저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데, 매번 점수가 좋게 나오지 않아요. 저는 정말 머리가 나쁜가 봐요.”
친구가 옆에서 거들었다.
“이 친구는 정말 열심히 하는데 결과가 안 좋아요.”
그 아이는 수업시간에도 늘 선생님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 순간도 한눈팔지 않는 모범적인 아이였다. 채점하면서도 의아할 정도의 점수가 나왔기 때문에, 나 또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보상받지 못한 노력에 얼마나 좌절감이 느껴질까? 그 아이의 표정과 몸짓, 말끝에 희미하게 느껴지는 떨림 속에서 속상한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넌 대기만성형인가 봐. 너 같은 친구들이 나중에 훨씬 더 잘 되는 법이거든.”
그 아이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노력하는 아이들이 결국 성공한다는 것을 안다.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노력'이 '두뇌'를 이기는 것을 수없이 봤으니.
물론 그 아이가 이 글을 읽지는 않겠지만, 그 아이의 눈빛이 내내 마음에 걸려서 오늘은 '대기만성'에 대해 써볼까 한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을 가진 '대기만성'이라는 성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노자의 <도덕경>이다. 그러나 <도덕경> 속 ‘대기만성’은 도의 정의에 관해 설명한 글이므로, 노력의 의미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아마도 이후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장군인 최염과 관련된 일화 이후 대기만성의 의미가 지금의 의미로 쓰이게 된 듯하다.
최염 장군은 당시 명장으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에게는 보잘것없는 외모에 변변한 벼슬 하나 얻지 못한 최림이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다. 최림은 늘 친척들에게 멸시를 당하곤 했는데, 최염장군만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큰 종이나 큰 솥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큰 인물도 성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내가 보기에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형이다.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면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것이야."
훗날 최염의 말대로 최림은 삼공(최고위 대신의 작위)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대기만성이라고 하면 또 생각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있다. 조선의 선비인 김득신이다.
명문 사대부가의 자제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배움이 느려서 10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을 배웠고, 배우고 난 뒤에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릴 정도로 기억력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그를 탓하지 않고 나중에 문장으로 이름을 날릴 것이라며 늘 격려해 주었고, 자신의 배움이 느린 것을 안 김득신은 다른 사람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였다.
남들이 한 권의 책을 몇십 번 읽을 때 자신은 몇백 번 혹은 몇 천 번 읽고 또 읽었다.
결국 그는 59세 때 비로소 과거에 급제했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명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책을 얼마나 많이 반복해서 읽었는지, 책을 읽을 때 늘 억만(지금의 백만)번을 반복해서 읽었다고 하여 그의 서재를 ‘억만재’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위 이야기에 나오는 두 사람은 모두 어릴 적부터 자신의 부족함을 늘 확인하며 살았을 것이다.
성취보다는 좌절에 익숙했을 것이고, 반복된 좌절 경험은 차라리 포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포기 대신 다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노력으로 채운 것이다.
노력이라는 것은 절대 모래처럼 흩어지지도, 구멍 난 항아리처럼 새어나가지도 않는다.
항아리가 너무 넓고 깊어서 지금 당장 물이 차는 게 보이지 않을 뿐, 그 노력이 끝까지 다 차오르면 남들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물항아리를 만들어낸다.
얄팍한 재주와 머리로 모든 것을 쉽게 이룬 사람들은 노력의 가치를 무시하기 쉬울 테니, 자신의 부족함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더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닐까?
앞으로도 그 아이가 당장의 성공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않고, 노력이라는 두 단어의 힘을 믿어 보란 듯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를 바란다.
大器晩成(큰 대, 그릇 기, 늦을 만, 이룰 성) :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