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쌓은 선함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내게 돌아온다.
지난 회차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 외롭지 않다는 뜻을 가진 성어에 대해 설명했는데, 아마도 이번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될 듯하다.
올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이런저런 보고서를 쓰며 하루를 보냈다. 한 해 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다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가 두 분의 강의를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제 살길을 찾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 정도로 힘들고 각박한 세상에 우리는 나의 이익에 앞서 남을 생각한다는 게 쉽지 않다. 그렇기에 그런 선한 이의 사연을 접했을 때면 더 묵직하고 또 마음 깊숙한 곳까지 감동이 스며든다. 그 두 분의 강의가 그랬다.
처음 만난 작가는 김동식작가였다. 학교 도서관 행사로 오셨는데, 초단편 소설집으로 이미 유명세를 탔던 분이라 학교에 강연을 오시는 것만으로도 제법 설레었다.
작가의 강연을 듣기 위해 그 작가의 책을 읽는 것은 당연했기에, 나는 내가 읽어보지 못했던 그의 첫 에세이 <무채색 삶이라고 생각했지만>을 읽었다. 그의 초단편들은 진즉에 다 읽었으므로.
에세이는 일기와 같다. 그 사람의 삶과 가치관과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내가 에세이를 쓰는 것보다 소설을 쓰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기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꽁꽁 숨겨두었던 내 부끄러운 마음까지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것만 같아서.
어쨌든 그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참 선한 사람이구나.’라고.
에세이 속 작가는 손해를 보는 게 남의 것을 뺏는 것보다 낫고,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것보단 차라리 무시당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작가의 강연을 직접 듣게 되었을 때, 역시나 에세이를 읽고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든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때로는 호구라는 소리를 들을 지인정 어디에서든 제 몫 이상의 노력을 해오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의 글쓰기에 대한 태도도 그의 삶의 태도와 맥락을 같이 했다. 게시판에 글을 쓰고 댓글에 코멘트를 달며 성장했다. 심지어 기분이 나쁠 법한 댓글에도 제 글을 돌아보고 성장하는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게 게시판의 글들이 책으로 탄생된 얘기를 하며, 마지막까지도 자신은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아이들의 어찌 보면 쓸모없을 것 같은 질문조차도 정성스레 대답해 주셨다.
아이들이 그 작가를 보며 하나만큼은 얻어갔으면 싶었다. 한 번쯤 양보를 해도, 손해를 보아도 괜찮다고, 착하게 사는 게 그렇게 바보 같은 것만은 아니라고.
한 달쯤 후에 두 번째 작가를 초청했는데, 그는 에세이집 <당신이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의 김민섭 작가였다. 나는 김동식작가에게서 느꼈던 그 느낌을 김민섭작가에게서도 또 똑같이 느꼈다.
자신을 대신해서 일본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는 똑같은 이름의 김민섭을 찾아 나선 ‘김민섭 찾기 프로젝트’는 많이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비행기 티켓 한 장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겠다는 작은 마음은 사람들의 선한 마음이 더해지며 부피를 키워 김민섭이라는 동명이인을 가진 또 다른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을 선사하게 된다
그 작가가 직접 이야기해주는 김민섭 찾기의 사연도 감동적이었지만, 작가의 이야기 속에 담긴 삶의 방식과 태도에 큰 울림을 느꼈다.
그도 선함의 영향력을 믿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조건 없는 선함을 베풀면, 그 선함은 마치 공기처럼 인지할 새도 없이 조용히 사람들에게 번져 나가 또 다른 곳에서 선함의 싹을 틔우는 것이다.
김민섭 작가의 작은 선행은 부피를 키워갔고, 작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버린 듯 보였다. 김민섭 작가는 그 일로 인해 유명세를 타고, 그렇게 얻은 수익을 결코 개인의 이익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은 재단을 마련해서 그곳에 쓰이도록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종종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는…….
그리고 놀랍게도 김민섭 작가와 김동식 작가가 큰 인연으로 연결된 사이임을 알게 되었다. 김동식 작가에게 책을 내보겠냐고 연락을 한 사람이 김민섭 작가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선함은 어떤 자석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과 같은 선한 이들을 끌어들이는 게 아닐까?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위에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같은 가치관을 가진 덕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것이다.
마치 선하게 살아온 김동식 작가에게 손을 내민 김민섭작가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선함을 쌓아왔기에 생각지도 못한 어떤 방식으로 그 보답을 받은 게 아닐까?
그래서 오늘은 '음덕양보'라는 사자성어를 소개할까 한다.
'음덕양보'는 '남 모르게 덕행을 쌓은 사람은 뒤에 그 보답을 받게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음덕양보의 유래는 아래와 같다.
중국 춘추시대의 주나라 때 손숙오라는 이가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 밖에 나가 놀다가 어떤 일을 겪고 근심에 쌓여 밥도 먹지 못한 채 울고 있었다.
그의 어머나가 이유를 묻자 손숙오가 말했다.
‘제가 오늘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았습니다. 머리가 둘 달린 뱀을 보면 죽는다고 하니, 아마도 저는 곧 죽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머리가 둘 달린 그 뱀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그 뱀을 또 다른 사람이 보면 죽을까 걱정이 되어서 제가 죽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은밀히 덕을 닦아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 보답으로 복을 받는다고 들었다. 네가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뱀을 죽인 것은 음덕이므로, 그 보답으로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
과연 그의 어머니 말대로 그는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훗날 초나라에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는 것만은 아니라고, 주위를 둘러보라고, 이기적이고 악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느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세상의 수많은 선한 이들이 있기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이며,
우리가 선함의 영향력을 믿기 때문에 인간다움을 고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라고.
陰德陽報(그늘 음, 덕 덕, 볕 양, 갚을 보) : 남 모르게 덕행을 쌓은 사람은 뒤에 그 보답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