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학기가 되면 매시간마다 논어 한 두 문장을 필사하는 수업을 했었다. 필사하기 활동의 마지막에 꼭 기억에 남는 문장을 적게했다. 아이들이 많이 선택하는 문장 중 하나가 바로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인데,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고 풀이되는 문장이다.
의외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할 것 같았다.
비단 아이들뿐이겠는가?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걸 이미 다 큰 성인조차 고개를 주억거릴 정도로 깊이 공감하는 것이니까.
'덕필유린(德必有隣)'이란 사자성어는 위의 ‘덕불고 필유린’이라는 문장을 네 글자로 줄인 말이며,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은 덕을 갖춘 사람은 그의 덕에 감화한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기 마련이므로 외로울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면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머지 나의 주관이나 가치관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무작정 좇거나 따르는 실수를 범한다.
그것은 남에게 인정받았을 때만 자신의 가치가 증명되는 것이고, 내 인생의 주도권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있게 된다.
sns에서 내 본연의 모습이 아닌, 사람들이 인정하고 부러워할만한 모습으로 자신을 꾸미고, 팔로워나 댓글에 연연한다면 그것 또한 내 인생의 주도권이 그들로부터 받는 인정과 관심이니, 그것 또한 주도권은 남들에게 있다.
남의 인정을 갈구하며 휘둘리는 삶이란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그리고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남들의 인정과 관심을 항상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 보상 또한 남들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내 것도 아니며, 얻었다고 하더라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아무리 움켜쥐려고 노력해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 변함없는 내면의 도덕적 가치를 굳건히 하고, 이른바 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갈고닦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아등바등 남들의 인정을 쫓지 않아도 내 주위에 나를 믿고 가까워지려고 하는 사람이 넘쳐나게 마련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바른 사람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눈만큼은 정확하니까.
나는 논어를 읽으며 그 시대의 공자를 상상하곤 한다. 어쩌면 공자가 말한 ‘덕불고 필유린’은 자신을 향한 위로이자 확신의 말이 아닐까?
공자가 살았던 당시의 왕들은 국력을 강하게 하여 천하를 재패하는 부국강병의 방법만을 원했다.
빠르고 또 강하게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오르는 것만이 목표인 그들에게, 덕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는 정치가 먹힐 리가 있었겠는가?
그 때문인지 공자는 노나라에서 51세가 지나서야 대사구(지금의 법무부장관)의 벼슬에 오를 수 있었고, 그마저도 권세가들의 견제와 공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게 된다.
이후로 제자들을 이끌고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녔는데, 그때도 공자는 많은 위협과 수모를 겪는다.
아마 그 당시 어떤 왕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며 떠돌이 신세가 되어야 했던 공자는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하지만 공자는 외롭다고 해서, 또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다고 해서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그러니 오늘날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게 아니겠는가?
결국 공자는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두고두고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으니, ‘덕불고 필유린’을 증명한 셈이다.
논어 필사 수업 후기에서 ‘덕불고 필유린’이 기억에 남는다고 쓴 친구가 감상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친구와의 문제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는데, 이 글을 읽고 위로가 되었다. 내가 친구에 연연하지 않고 먼저 바르고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지금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거나, 또는 외면받아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서 찾지 말라고,
나의 가치는 나만이 만들어나가고, 나만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니,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德不孤 必有隣(덕 덕, 아니 불, 외로울 고, 반드시 필, 있을 유, 이웃 린) :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