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의 첫사랑이다. 내가 스물 다섯 겨울, 쓸쓸한 계절에 만난 서른둘의 그 사람. 처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갔다. 누구보다 순수한 사람이었다.
어리숙해 보였고, 대화를 할 때조차 사람 눈을 잘 쳐다보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키는 멀대 같이 크고 얼굴은 조막만 했다. 몸은 단단해 보였고 옷 스타일조차 단정해서 마음에 들었다. 멀리서 보면 남자 같고, 가까이서 보면 아이 같았다.
처음 그를 봤을 때 우리는 같은 회사에 다녔는데 그는 이상하게 내 관심을 가져가는 사람이었다.
무뚝뚝한 얼굴에 웃을 때 눈은 그대로 두고 입만 웃는 사람.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는 사람. 외로움이 눈에 가득한 이상한 사람.
그 사람은 말수가 적고, 행동이 조금 느렸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곳에서 혼자만 리듬이 달랐다. 어딘가 한 박자 느리지만, 그 박자 안에는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어떤 사람일까, 그 조심스러움의 안쪽이 궁금했다.
퇴근길에 우연히 같이 편의점에 들렀던 날이 있었다. 나는 담배 한 갑과 맥주 한 캔을 샀고, 그 사람은 딸기우유 하나를 들었다. 분홍빛 우유갑. 나는 웃으며 물었다.
“딸기 우유 좋아해요?”
그 사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같았다. 그는 순식간에 나에게 귀여운 사람이 되었다. 처음 나눠 본 대화 속의 그는 너무 순수한 아이 같았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딸기우유 따위를 좋아하는 귀여운 사람이었다.
그가 계산대로 가는 동안 나는 편의점을 나와 담배를 뜯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지갑 속 동전을 꺼내 계산대 위에 또박또박 올려놓는 그의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가지런해 보였다.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라이터를 찾느라 주머니 속을 뒤적이는데, 그 순간 그가 말없이 다가와 불을 내밀었다. 불빛이 순간 내 얼굴을 비췄다.
불이 붙자마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거두었지만, 나는 괜히 뜨거워진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짧은 순간이었는데 오래 남았다.
출근길은 늘 비슷했다. 어둡고 습한 계단. 하얀 타일 벽에 붙은 광고지, 멀리서 다가오는 전철의 시끄러운 소리, 그 모든 반복 속에서, 항상 같은 곳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옷을 입고 전철을 타는 그가 있었다.
전에는 모른 척했지만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전철역 플랫폼 끝, 기둥 옆에 그 사람이 보이면 쏜살같이 달려가서 옆에 자리를 했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자꾸 앞질러 나를 달리게 했다. 개찰구를 통과해 계단을 올라가면서 이미 마음은 그의 옆자리를 향해 있었다.
매일 아침 먼저 인사를 했고, 그 사람은 항상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를 위해 딸기우유를 사서 기다린 날도 있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회사 근처 편의점에 들러 꼭 담배 한 갑을 사서 손에 쥐어 줬다.
선을 확실하게 긋는 그 사람이었지만 그런 모습이 좋았다.
어느 날엔 그가 일하다 손을 다쳤다. 피가 많이 흐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순간 내 눈에는 그 붉은 자국이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작은 상처였지만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망설일 겨를도 없이 달려가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준비해 둔 것도 없으면서 괜히 서둘러 반창고를 꺼내 붙였다, 너무 긴장한 탓에 테이프가 삐뚤게 붙었다. 나는 더 화가 났다.
“조심 좀 하라니까요.” 말은 화를 내는 투였지만, 속은 그저 덜컥 겁이 났을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입술 끝이 어정쩡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 웃음이 더 속상했다.
그날 밤, 혼자 집에 앉아 있자니 낮의 그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작은 상처에 맺히던 피, 피 냄새, 슬쩍 웃던 그의 입,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손길까지.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해서 마치 지금 내 앞에서 다시 펼쳐지는 듯했다.
방 안은 고요했지만 내 머릿속은 그 사람으로 가득했다. 눈을 감아도 그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뚜렷했다. 상처 난 손을 내 쪽으로 내밀던 순간, 내가 덜컥 겁에 질려 있던 마음까지 다시 살아났다.
얼른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괜찮은지 보고 싶다기보다, 그냥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계속 뛰었다.
나는 그 사람을 ‘갖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욕망의 대상이라서가 아니라 그를 품에 두면 그가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로워 보이는 눈빛, 혼자만의 박자, 늘 단정하게 차려입은 몸짓 속에서 알 수 없는 공허가 새어 나왔다. 그 공허를 내가 메워주고 싶었다. 그 사람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했다.
그를 가지면, 나는 반드시 그를 아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불안과 서툼을, 내 손으로 감싸주고 싶었다. 누구도 잘 돌보지 않았던 것 같은 그의 마음을 내가 대신 돌봐주고 싶었다.
작은 상처에도 놀라버리는 내 성급한 마음조차, 사실은 그를 지켜주고 싶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거였다.
이상하게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거절당할 거라는 예감이 선명했음에도, 물러서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미 나에게 ‘갖고 싶은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냥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든 내 옆에 두고 싶고, 나만이 알 수 있는 미소와 부끄러움을 보고 싶은 사람.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을 갖고 싶다. 그 순간 내 안에서 결심이 단단히 자리 잡았다. 다른 이류를 찾지 않아도 충분했다.
표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입술 끝까지 차오르는 마음은 결국 고백이라는 형태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내 마음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반 삭발에 노랗게 탈색한 머리를 하고 있었고, 살은 퉁퉁 붙어 있었으며, 술과 담배를 즐겼다. 말투는 거칠었고, 표정은 종종 무심하거나 냉소적이었다.
반대로 그는 단정했고, 조심스럽고, 때로는 아이 같을 만큼 순했다. 그에게는 나 같은 사람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멀리해야 하는 이유만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를 가로막는 건 이성의 계산이 아니라 본능 같은 확신이었다.
그는 이미 ‘갖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의 부끄러움, 그의 고독, 그의 느린 리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세 달 동안, 하루에 한 번씩 고백했다. 같은 말이지만 같은 말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진심이 앞서 무겁게, 어떤 날은 농담처럼 가볍게. 그날의 내 기분, 그날의 그의 표정에 따라 조금씩 다른 톤으로 흘러나왔다.
커피를 한잔 타서 가져다주면서, 퇴근길 횡단보도에서, 일하다 그 사람의 자리에 가서. 장소와 상황은 달라도 내 마음은 같았다.
“한 번만 사귀어 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처음엔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제발 그만해요.”, “장난하지 마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의 반응도 변했다. 한 달쯤 지나서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웃음 속에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다. 확실히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내가 물러나지 않는 집요함이 조금씩 그의 마음에 금을 내는 듯했다.
내 고백은 반복이었지만, 그 반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농담처럼 던진 한마디가 그의 귀에 남았을까, 혹은 진심이 묻어난 눈빛이 그의 마음에 흔적을 남겼을까.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믿고 싶었다.
매일 한 번씩, 고백이라는 이름의 돌을 던지면 언젠가는 그의 마음의 호수에 파문이 일어나리라.
세 달이 지나고 드디어 그는 내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왔다. “그래요, 같이 가.” 짧은 대답이었는데 내 귀에는 오래 울렸다.
우리는 주말에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쇼핑몰을 천천히 걸었다. 그날 하루는 특별한 이벤트도, 화려한 장식도 없었다. 그저 보통 연인들이 하는 코스를 그대로 따라갔을 뿐인데, 내겐 모든 것이 새롭고 벅찼다.
영화관 의자에 나란히 앉아 팝콘을 건네주던 그의 손, 밥집 테이블 건너편에서 조용히 숟가락을 들던 모습, 쇼윈도 앞에서 잠시 멈춰 서 있던 뒷모습. 하나하나가 나에겐 오래 기다려온 보상 같았다.
밤이 되어 우리는 삼겹살집 간판 불빛 아래에 섰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주잔에 맑은술이 따라지며 잔이 부딪힐 때마다 가슴도 덜컥거렸다. 나는 웃는 얼굴을 애써 유지했지만, 속에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내 손바닥에 손끝을 올려 간지럽히듯 스쳤다. 놀란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는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얽었다.
내 세상이 통째로 뒤집히는 것 같았다. 가슴은 미칠 듯이 뛰었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지금이구나.’ 기회가 왔다고 마음이 소리쳤다. 나는 조심스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오빠, 후회 안 한다니까요. 한 번만 믿어봐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귀까지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만나보자.”
받아들여질지 몰랐던 수없이 많던 고백 중, 그날의 고백 하나가 드디어 먹혀들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고백한 사람처럼 부끄러워했다.
눈을 피하며 잔을 돌리던 손, 불판의 고기만 뚫어져라 보던 시선, 빨갛게 달아오른 귀.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아서 어떻게 서른두 살이 되었을까.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갑작스럽지만, 또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귀기로 했다. 마치 오랫동안 예정되어 있던 대사처럼, 둘 사이에 흘러들어온 결론이었다.
“우리 첫날인데 삼겹살은 좀 그렇죠?”
나는 반쯤 장난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속으론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첫 데이트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내가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손바닥에 닿는 그의 체온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 단단한 손끝이 내 손가락 사이를 천천히 파고들었다.
“좋아하잖아 삼겹살, 네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
그 말은 마치 준비된 대사를 억지로 용기를 내어 뱉는 연기 톤 같았다. 순간 그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얼굴은 고개를 푹 숙여 숨겼지만, 귓불까지 물드는 붉음은 감출 수 없었다. 나는 그 부끄러움이 너무 사랑스러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 같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손을 잡는 순간조차 서툴고, 마음을 전하는 말 한마디에도 귀가 빨갛게 물들던 그 모습. 나는 그 서투름이 오히려 더 좋았다. 꾸밈없는 진심이 거기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칼바람이 얼굴을 할퀴던 겨울밤이었지만, 그의 그 대사 하나가 내 몸 전체를 덮어주었다. 따뜻한 불빛이 안쪽에서 켜지는 듯했다.
그날은 2019년 1월 28일, 내 세 달 동안의 짝사랑이 끝난 날이었다.
후에 들으니, 그는 한 달 쯤부터 먼저 고백하려 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늘 부끄러움이 앞서는 사람, 내 눈에는 더없이 귀여운 사람이었다.
결국 나의 고백이 앞질렀지만, 그의 마음도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