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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듬 Dec 02. 2015

꼴찌들의 삼일천하

교실 속 이야기

학기초부터 우리 반은 체육을 못하기로 3학년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 있었다. 농구나 풋살도 못한다고 정평이 나있었지만, 그 중 가장 못하기로 유명한 것은 축구. 특히 날아오는 공이 무서워 손을 못 대고 도망만 다니는 ‘자동문’ 골키퍼가 있는 팀으로 유명했다. 2학년 때까지 축구를 하다가 전학 온 공격수 A가 한 명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학기 초에는 축구를 잘 못해도 그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것이 좋아서 즐거워하던 우리 반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반에 여러 번 깨지며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게다가 축구를 놓아버리게 된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축구 실력이 좋은 A가 잘 뛰지 못하거나 공을 놓치는 친구들을 보고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닦달해대는 것에 많은 아이들이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A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에는 모두들 동의했지만, 함께 축구를 하면 스트레스가 생겨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반은 체육 시간이나 스포츠 클럽 시간에 축구를 할 기회가 생겨도 다른 종목을 하거나, 노닥노닥 수다나 떨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나마 축구를 해보려고 애쓰던 A는 2학기가 시작되고 곧 꿈을 찾아 전학을 갔다. 결국 우리 반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안 남게 되었다.

10월이 되어 체육대회 날을 앞두고 학교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때가 때인지라 다른 반 수업에 들어가면 다른 반 아이들이 꼭 한두 마디씩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쌤~ 쌤네 반은 축구 또 꼴등하겠죠?”

“A가 가서 어떡해요? B가 또 골키퍼해요?” 

“우리 반이 1등할 건데… 쌤네 반은 아무것도 우승 못할걸요?”

내가 놀림을 당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우리 반 아이들이 다른 반 아이들에게 축구 때문에 자꾸 놀림을 당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내심 우리 반 아이들이 기적처럼 잘해서 다른 반 아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체육대회 날. 반장은 축구가 하기 싫다는 아이들을 달래어 겨우겨우 한 팀을 편성했다. 후보 선수를 하겠다는 아이도 하나 없어 딱 11명이었다. 축구 경기에 출전하는 아이들의 의욕도, 사기도 완전히 떨어져 있던 대기 시간, 반장이 용케 부전승 티켓을 들고 돌아와 아이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쌤! 저희 한 번만 이겨도 다른 반 4개는 제친 셈이잖아요?”

“그럼, 그럼!”

어쩌면 잘하면 한 번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경기장으로 나서는 아이들의 뒷통수에 대고 “이기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 힘내라, 9반!”하며 응원을 했다. 

부전승 티켓이 아이들을 바꿔놓았던 것일까? 우리 반은 첫 경기에서 후반전까지 골이 안 나다가 후반전 초반 C가 1골, D가 1골씩 넣으면서 2:0로 2반을 대파했다. 첫 경기의 예상치못한 승리로 우리 반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우리 진짜 결승 올라가는 거 아냐?”

두 번째 경기, 우승 후보로 점쳐지던 8반과의 경기였다. 8반은 벌써 세 번째 경기여서인지 기운이 다소 빠져 있어 보였다. 전반전부터 우리 반에서 골이 터지기 시작했다. C, E, F 1골씩! 3:1로 8반을 이겼다. 수업 시간마다 9반이 꼴찌할 거라고 놀려먹던 녀석들이었기에 풀이 죽은 모습에 잠시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경기, 결승전. 1반과의 경기였다. 이제는 우리 반도 세 번째 경기였기에 이미 많이 지쳐 있었는지 전후반전 내내 1반에게 줄곧 끌려 다니며 한 골을 내주었다. 그러다가 종료 3분 전에 기적적으로 한 골을 만회하고야 말았다. 연장전은 별다른 득점 없이 무승부. 결국 심장 떨리는 승부차기 끝에, 골키퍼의 선방으로 우리는 5:4로 이기게 되었다.

축구 우승에 신이 나 소리를 질러가며 대기석으로 뛰어 들어오는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우승의 기쁨을 즐겼다. 그러다 내 옆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는 F에게 물었다.

“F야. 우리 A도 없는데, 진짜 잘했다. 그치? A가 있을 때는 한 번도 승리를 못해보더니 A가 가니까 우승했네~ A가 서운해하겠다, 그치? 하여간 진짜 고생 많이 했어. 멋졌어!”

내 이야기를 들은 F가 대답했다.

“쌤. A가 없어서 우승한 걸걸요?”

“응?”

“A가 없으니까 공이 여기저기 잘 간 거예요. 애들이 골고루 골 넣었잖아요. A 있었으면 무조건 A한테만 공 갔을 걸요? 다같이 해서 잘 된 거죠.”

F가 맞았다. 축구는 실력 좋은 한 사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A를 들먹여버렸다. 공격수로서 1등이었던 A 없이 축구 꼴등 11명이 힘을 모아 얻어냈기 때문에 더더욱 값진 승리였던 것임을 놓칠 뻔했다. 3학년에서의 꼴등 9반, 거기서도 축구를 못하는 꼴등 11명이 만들어낸 멋진 결과인 것을. 이거야말로 진짜 ‘꼴찌들의 반란’이 아닌가. 애들이 골고루 골을 넣었다는 데서 ‘다같이’의 힘을 찾아낸 F가 기특하게 여겨졌다.


우리는 축구 꼴찌였다. 체육대회에서 축구 1등을 했지만, 아마 새로 대진표를 짜서 부전승 없이 경기를 하면 다시 꼴찌로 추락할 것이 유력하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난 후부터, 이미 다른 반들과 체육 시간에 축구 경기를 하며 패배의 쓴맛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게다가 동계 미니체육대회를 앞두고 첫 게임에서 패배하고야 말았다. 

그래도 우리 반에게 달라진 긍정적인 변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축구 우승’이라는 한 번의 경험이 아이들을 다시 축구장으로 끌어냈다는 것. 두 번째는 때때로 반에서 해결해야할 과제가 생겼을 때, 잘 못하겠더라도 일단 ‘함께, 다같이’ 한 번 해보자는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는 것. 쉽게 포기해버리지 않고 ‘한 번 해보자’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삼일천하와 같은 축구 우승이었지만, 나와 아이들에게는 잊지 못할, 의미 있고 행복한 추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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