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푹푹 내리는
눈이 푹푹 내린다.
오늘같이 눈이 내리는 날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인, 그 이름 백석!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불멍 물멍도 좋지만 눈멍은 나를 소녀로 돌려놓는다.
나타샤가 그립고, 당나귀의 응앙응앙이 귓전을 맴돈다.
문인 단톡방에 농을 한 자락 던졌다.
"눈이 푹푹 내립니다. 백석시인과 나타샤와 당나귀가 생각납니다. 문정희 시인의 <눈부신 고립>도 소환되네요.
와우! 저 눈밭을 같이 쏘다닐 애인을 구합니다."
댓글이 푹푹 쏟아진다.
"이숙진 선생님! 너무 멋지십니다."
"멋져요."
"핫, 엄청 낭만적!!"
"동성도 가능합니까?"
"저요, 저요!" 등등.
겨울 눈밭은 차갑기만 한데, 그들의 다정한 댓글이 따스하게 다가오는 밤이다.
공감해 주는 지인이 있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다.
어떤 친절한 분은 시 전문을 올려 주었다.
(아래)
(사진: 픽사베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눈이 푹푹 쌓이는 밤
나는 혼자 쓸쓸히 소주를 마신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이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출출히 : 뱁새
* 마가리 : 오막살이 평안 방언
(사진 : 픽사베이)
한계령을 위한 연가/문정희
한 겨울 못 잊을 사랑하고
한계령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 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심장을 향해
까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이 밤 양희은의 한계령을 같이 들으면 더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