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색(紫色)

by 소봉 이숙진


자색(紫色)



紫布(자짓빛)에 대한 견해


[향가신해석(鄕歌新解釋)]의 의문

특히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에 대하여 - (下)


<자지바회끗히 잡 오손 암소 노흐이시고 날 아닌디 붓글 이사든 꽃을 꺽어드리오리다.>

(자짓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를 노코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드리오리다.)


紫曰質背(자왈질배) 계림유사의 “자왈질배”에서 찾아본다.

이 “질(質)”의 현음(現音)이 “질”이다. 이 “질”의 고형(古形)은 “딜”일 것이니 “자왈질배”의 “質”은 “디”음을 借(차)한 것이요, “背”의 訓은 “등”이니 “자왈질배”의 “배(背)”는 “ㄷ”음을 借하였음에 틀림없다. “질(質)”의 음에서 “디”를 借하고 “背”의 訓에서 “ㄷ”을 借하여서 “O”이란 한 개의 말을 이루었으니 이 “딛”이 곧 “紫”의 색소(色素)를 말함이다. “지(芝)” “지치”라 하고 이것을 다시 한자로는“紫草(자초)”라고 쓴다. 또는 “紫色”을 “지칫빛”이라고 씀을 보아(경상도 방언) “”의 훈이 “딛”임을 알 수 있다.


(1940. 3. 8. 동아일보 게재된 경파(鯨波) 이상인(李相寅)선생(필자의 백부)의 글 일부 발췌)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활동)>



자색(紫色)

이숙진


자색은 자주색과 조금 다르다. 사전적 해석은 ‘자줏빛’이지만, 흔히 바이올렛(violet)이나 제비꽃을 자색이라고 하는 걸 보면 애오라지 보랏빛에 더 가깝다.

생량머리에 드는 건들마로 풀쐐기처럼 목덜미를 쏘아대던 햇살이 잦아들 즈음이면 소나무 그늘에서 도토리 키 재기 하던 맥문동이 소리 없는 합창으로 기지개를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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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과 나팔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슴벅슴벅 아장거리다 아뿔싸 쭈그렁 방탱이가 되지만, 맥문동은 나무가 그림자를 토해낼 무렵에야 자색과 어상반한 꽃대가 보랏빛을 토해내며 곤댓짓을 해대니 하는 말이다.

비비 틀면서 피는 꽃이라는 비비추와 습기가 자박자박 있는 곳에 자라나는 물봉숭아도 보랏빛이다. 흔들리는 체에서 가루 날리듯 바람 따라 흔들리는 싸리꽃을 눈에 담고 온 가을날은, 모데라토 리듬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니 산모롱이 돌아눕는 햇살 한 줌도 보랏빛 꿈에 젖는다.

가을꽃은 암수가 한 몸에 있는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아스라함이 있는 보라색 꽃이 많은 까닭은 요란한 색깔로 나비를 유혹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일까. 아니면 무지갯빛 가운데 가장 파장이 짧은 보라의 앙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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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톤일수록 여성스럽고 엘레강스한 분위기를 내며, 어두운 톤에 가까워질수록 차분하며 격조 높은 이미지가 깔밋하다.

푸른빛이 많은 자색은 고급스럽고 붉은빛이 많은 자색은 요염하고 매력적이다. 라벤더색은 친절하고 달콤하다.

보라색은 우리나라 천원 지폐의 기조색상이기도 하고, 신용카드 중에도 보라색 카드가 있다. 연봉 일억 원 이상의 대기업 혹은 외국계 기업 부장급 이상의 고소득자에게만 발급된다는 보라색 카드의 뜻이 ‘고귀함’이란 것을 보면 꽤 품위 있는 색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복 저고리도 자색으로 해 입었고 자색 코트와 자색 원피스도 즐겨 입는다. 멋있다는 부러움을 분에 넘치게 받았다. 적극적인 이는 브랜드를 확인하고 어디서 샀느냐고 꼬치꼬치 물으며 당장 뛰어갈 기세다. 기분이 좋아 자색이 살굿빛 착시를 가져올 만큼 따뜻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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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에는 인터넷 쇼핑몰을 기웃거리며 소가 뜸베질 하듯 참살이 식품을 찾아 흘근번쩍하게 된다. 천성이 게으른 나로서는 어차피 고자누룩해지고 말 일이지만, 세월의 회초리 앞에서 뒤늦게 건강 정보에 안테나를 곧추세운다.

그중에서도 안토시아닌이 듬뿍 들어있어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킨다는 자색 양파와 항산화 작용을 해 준다는 자색 고구마와 감자가 관심을 끈다.

보랏빛 세 가지를 주문했더니 여느 장정 주먹만 한 실한 것들이 배송되었다. 비 오락 개락, 흐릴락 말락 어느 날이든 이 자색 채소만 있으면 걱정이 없다. 양파는 가장자리는 자색이고 속으로 들어갈수록 흰빛이 선명하니 나비 잠을 자는 아이처럼 신비스럽고, 해바라기 하는 옥양목보다 더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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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과 흰빛의 대비는 새뜻하다. 내가 즐겨 입는 옷의 배색(color combination)이어서 더 익숙하다. 올 봄 패션은 퍼플과 화이트의 앙상블을 구현할 듯이 아름답다.

맛으로 느껴도 맵지도 않고 달달하면서 알싸하다. 쌈장에 쿡 찍는 순간 담숙하여 누가 딴죽이라도 걸라치면 옷고름도 못 여민 채 퉁바리가 나올 만하다. 감자는 껍질을 까면 노란 속살이 일반 감자보다 훨씬 깊은 맛을 낸다. 이 자색 양파와 감자를 섞어서 볶으면 그 색감의 조화로움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겉 볼 안이라고 속으로 들어갈수록 흰빛이 깨끗하고 깊은 맛이 나는 양파 같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않을까. 정녕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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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불감증에 걸린 그 시대의 나침반이요 등불이라고 했으니, 등불까지는 아니더라도 흉내라도 내 보도록 애써 볼 일이다. 그러자면 우선 건강이 우선이겠다. 컬러 푸드의 인기를 실감하며 앞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자색 채소를 중심으로 건강 식단을 꾸밀 요량이다. 이 물색없는 주부의 희떠운 다짐이 얼마나 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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