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둔치가 엿본 세상
<15일 이전의 글>
한강 둔치가 엿본 세상
학교에서 돌아온 소년은 가방을 집어 던지고 한달음에 산에 오른다. 휘우듬한 소나무에 기대어 하모니카를 불다가 친구들이 오면 낫 던지기해서 소꼴 따먹기도 한다. 장수잠자리 암놈 하나 실에 꿰어 빙빙 돌리면 바람난 수컷들 수없이 걸려든다. 날개를 열 손가락 사이에 끼워 신나게 내닫다가 좀 너누룩해지면 풀밭 위에 넉장거리로 벌러덩 누워 눈을 감는다.
잠시 후 이름 모를 새가 지천으로 울어댄다. 소년은 휘파람으로 흉내 내며, 하늘 호수에 멱 감고 나온 우윳빛 낮달이 걸릴 때까지 뒹굴며 논다.
그렇게 뛰어 놀던 소년은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낸다.” 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는 아파트 실 평수처럼 늘 초과해 있는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그 흔한 미팅 한 번 제대로 못해 보고 대학 시절을 보낸다. 방학이면 연애 한번 하자고 얄망스럽게 비벼대는 읍내 별다방 미쓰 김 손도 한번 못 잡아 본 숙맥이었다.
고향 뒷산이 그리울 때는 한강 둔치에 나가 새소리 바람소리 흉내를 내며 자연에 몸을 헹구던 날들을 그리워했다.
그런 저런 세월 속에 사회초년병이 된 그의 가슴을 숯 검댕이 보다 더 까맣게 태우는 여자 친구가 생긴다. 선배와 친구들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아 천신만고 끝에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한강 둔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을 더듬어 세딱뙤기가 되었으나 그녀는 감격해 준다.
부채바람 받는 쪽의 숯불처럼 서로의 마음이 환해졌을 때 그녀의 입술을 훔친 곳도 둔치다. 지나치는 남녀를 힐긋거리며 저들도 다 그 짓거리 했겠구나 생각하며 피식 웃은 곳도 둔치다.
모든 업무가 전산화 시스템이 된 금융계에 구조 조정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청운의 꿈을 안고 금융계의 거목이 되어 보겠다고 모든 당근을 뿌리치고 본사를 고집했던 석이는 7억을 받고 명예퇴직을 하느냐 쫓겨 날 때까지 버티느냐 갈등한다.
답답한 심사를 가눌 길 없어 소주 한 잔만 걸치면 한강 둔치를 찾아 불어오는 바람에 가슴을 삭이며 처자식의 얼굴에다 부모님을 떠올리며 고뇌한다.
다행히도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퇴출은 면했으나 가족과 떨어져 을씨년스러운 빈 방에서 내일을 다짐하는 인고의 나날 끝에 서울 변두리 지점장으로 발령이 난다.
너무도 열악한 지역이라 실적이 부진해 또 퇴출 선상에 오른다. 그 동안 명예퇴직금은 점점 줄어든다. 석이는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기에 팔방으로 노력한다.
죽마고우가 석이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퇴직금 7억을 예치해 준다. 허나 예금 실적보다 대출 실적이 더 우선인 것이 금융계 현실이다. 결국 친구의 예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실적을 올리기로 작정하고 증권사친구에게 상의를 했다.
살비듬 퉁퉁한 친구는 은근슬쩍 입이 벙그러져서 이자가 문제가 아니라 플러스알파를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돈을 맡기라고 한다.
친구에게 7억을 맡기고 나니 모든 게 자잘모름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은 착잡한 심정으로 새해를 맞는다. 새해 벽두부터 주식시세가 수직 강하로 미끄럼을 탄다.
대출을 석 달만 쓰면 되는데 석 달 사이에 7억이 1억으로 줄었다. 석이는 그때부터 아내와 죽마고우 얼굴을 맑은 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기에 하루하루 술의 힘을 빌린다.
신문에 대문짝 만 하게 모 은행 지점장이 몇 십억을 챙겨서 종적을 감추었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석이는 남의 일 같지 않아 벌레 씹은 얼굴이 되며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
간간이 아낙네의 악다구니도 들리고 술 취한 남정네의 권위적인 호통소리도 들리며 시장 바닥처럼 시끌벅적한 것이 옛날 그 고즈넉한 추억의 둔치가 아니다.
젊은 연인들이 찾던 곳이 자식들 눈과 귀를 피하여 고함쳐야 하는 중년들이 단골손님이다. 코로나로 빚더미에 앉은 소상공인들의 한숨 소리로 땅이 꺼진다. 낮에 "본부에 알릴 수밖에 없다" 던 친구 말을 되 뇌이며 그를 원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권모(權謀)는 상식이고 술수(術數)는 일상인 정책 입안자들에게 욕지거리도 해 대고 코앞에 보이는 한강 물에 뛰어들어 세상만사 잊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으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흐르는 물에 잿빛 오장육부를 씻어 담는다.
석이는 반세기를 의리(義理) 하나로 살아온 인간관계를 저버릴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아내 몰래 집을 저당 잡히고 대출을 받아 이자에 충당한다.
그런 어느 날 , 아내가 숨을 학학거리며 어디 가서 얘기 좀 하자고 할 때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한강 둔치에서 악다구니하던 여자들을 떠올리며 택시를 잡는다.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아내를 달랠 염치도 없어 엉거주춤한다. 그 놈의 인격이 뭔지 뺨이라도 한 대 갈겨주면 시원하련만 참느라고 꺼억 꺽 하는 아내의 우아한 뒷덜미는 차라리 고문이다.
개새끼 소 새끼 해주면 조금은 상쇄되련만 "당신이 술에 절어서 사는 것이 직장 내에 스트레스 때문인 줄 알았다" 며 흐느끼기만 하니 하늘로 솟을 수도 땅으로 꺼질 수도 없는 민망함에 그나마 표정 없는 한강이 고마울 뿐이다.
아내가 나서서 해결을 해 나간다. 입주 희망에 부풀어 있던 새 아파트 팔고 살던 집도 처분하고 사글세방으로 옮겨 앉았다. 모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나 '매도 한 몫 맞는 것이 낫다' 고 몰래 대출받아 지방 땅 샀던 일 이실직고 하기위해 한 번 더 한강의 신세를 진다.
"실수는 용서가 되지만 배신은 용서가 안 된다" 며 한 옥타브 낮추어 이혼을 종용한다. 만나고 헤어짐의 인생 역경(逆境)을 줄줄이 꿰고 있을 한강 물이 비웃는 것 같다. 양가 부모님과 자식들에게 남편의 체면을 위해 애써 변명해 주던 천사는 더 이상 없다.
석이는 퇴근 후 아내 얼굴 보기 미안해서 소주병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어기적거리며 한강 둔치로 내려간다. 가로등 불빛이 노란 띠를 만들어 비스듬히 안으며 위로해 준다. 하루 종일 반란을 일으키던 위장이 안정을 찾는다. 반겨주는 곳이 있음에 안도한 것이다. 내일은 밤마다 아이들 몰래 소리 죽여 우는 아내를 이곳으로 불러내어 실컷 큰소리로 울게 해 주고 용서를 구하리라고 비장한 결심을 한다.
엉거주춤한 가장의 희미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