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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진 Feb 24. 2022

가면 놀이

                                                                  가면 놀이  

   

   그날은 큰애 학교 연구실을 둘러보고 지도 교수를 만나는 날이었다. 지도교수는 아주 젊어 보이는 핸섬 가이다.

 그는 2002년 월드컵을 들먹이며 코리아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인 후, 아들이 두뇌가 뛰어나고 훌륭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부부는 합창하듯이 ‘Thank you’를 연발하며 기뻐했다. 남편이 카투사로 복무했기 때문에 소통에 문제는 없었고 아들이 친절하게 통역을 해 줬다.

다음은 유일한 한국인인 화학계의 대가이시고 명예교수이신 분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평소 아이에게 어드바이저(Adviser)가 되어 주시고, 댁에서 파티를 자주 열어서 한국 학생들에게 고기를 실컷 먹인다는 분이시다.

교수실에서 뛰어나와 남편과 포옹하며 반겨주시는 폼이 이산가족 상봉 모습의 기시감이다. 방 전체 벽면에 오토바이 라이딩 사진이 생동감을 유발한다. 영화 포스터인 줄 알았더니, 그 모델이 모두 일흔이 넘으신 노 교수님이란다.  존경스럽고 멋스러웠다.

  여기서 문제 하나, 교수님이 아들 칭찬을 늘어놓자 남편 반응이 아까와는 달리

  “뭘요, 변변치 못합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아이입니다.” 한다.

  “하하하, 미국에선 겸손 가면 쓰면 모두 곧이듣습니다. 정말 변변치 못한 줄 압니다. 저는 그 겸손을 이해합니다만.”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의 정서가 가장 오류를 남길 때는 이 겸손 가면이라고 한다. 미국인 교수에겐 감사를 표하고 한국인 교수에겐 겸손 가면을 쓴 해프닝도 한국의 도덕개념인 성리학적 질서 때문이었을까. .

     

   가면이 갖는 특징은 이중성이다.  

   동남아 여행길이 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국 씨 푸드 식당에 갔을 때다. 광장이 넓어서 종업원들이 인라인을 타고 서빙 한다. 새우 껍데기가 산을 이룰 즈음, 우리 테이블에 손닦는 스팀 타월을 면면이 대령한다. 킹크랩은 구경도 못해 본 대표 서민 주제에 왕후의 대접이라  원 달라 씩 팁을 줬더니, 금방 소문이 나서 너도나도 스팀 타월을 갖고 몰려들었다.  내 생일이니 모두 준다고 원 달라 씩 줬더니, 빙 둘러서서 “해피 버스데이 투유”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때는 와이파이도 없던 시절인데, 더 빠른 인라인 정보 시스템이 있었다. 마이크에서 생일축가가 울려퍼지고, 잠시 후 지배인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사장님의 서비스”라며 생일 케이크를 가져왔다. 손벽을 치니 종업원 20여 명이 우리 테이블에 새카맣게 둘러서서 그 큰 광장이 울리도록 축가를 불러준다. 일행 중 유난히 다정하던 CEO 부부가 와인을 주문해 주셔서 일행들에게 한잔씩 대접할수 있었다. 그날 그 식당에서 저수지  위 무대에서 쇼가 있었는데, 우리 테이블에 가면을 나눠주면서 나가서 출연진과 같이 춤을 추라고 권한다. 그냥 나가라면 쑥스러워 엄두도 못냈지 싶다. 가면 뒤에 숨으니, 일인칭 나가 아닌 삼인칭 불특정 다수가 되어 신나게 춤을 추게 된다. 그날의 만찬과 여흥은 잊지 못한다. 가면이 갖는 이중성과 패키지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가면은 아웃사이더들의 배설의 수단이다.

   별신굿탈놀이의 전승지인 하회 민속 마을에 간 적이 있다. 아이들 데리고 고향 집과 어머니 산소에 갔던 길이다. 마침 음력 정초라 성황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마당극이 벌어지고 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오니 이번엔 탈춤이다. 해학적이다가 능청스럽게 양반의 꼴불견을 꼬집고, 파계승의 일탈을 조롱하고, 과부의 속마음을 풍자한다. 탈은 풍자를 위해 고안된 물건이다. 힘이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대적할 때 아주 마침맞은 무기다.      

   탈춤은 탈 난 세상을 질타하는 아웃사이더들의 몸짓이고, 지배층의 허위 허식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는 통쾌한 배설의 수단이다. 이렇다 보니 탈이 차츰 정체를 숨기는 가면으로 변질하지 않았을까.

 

 한쪽에는 각종 탈이 전시되어 있어서 좋은 볼거리였다. 각시, 주지, 백정, 할미, 파계승, 양반과 선비, 부네, 이매 등 종류가 가지각색이다.

   콧구멍도 없이 뭉툭한 코, 헤벌쭉 넙데데한 볼때기, 웃는 듯 슬픈 듯, 성난 듯 앙다문 입, 익살맞고 험상궂은 야릇한 탈이 보기만 해도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있을까. 단체 회식 후 뒤풀이에선 계급장 떼고 흥을 돋우려면, 일단 가면을 써야 한다. 얼굴을 감추지 않으면 제대로 흥을 발산하지 못한다. 평소에 완벽가면을 쓰고 산 탓이다. 상대의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보면서 더 흥취에 젖는 것도 한몫을 한다.

 

    가면은 익명의 ID나 비실명제로 발전했다.

   대선의 계절이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 올라 온 뉴스에 댓글을 달 때도 실명제와 비실명제가 있다. 익명의 ID로 들어가면 댓글이 강경하다. 실명을 요구할 때는 조금 완화해 부드럽게 올린다. 가면 뒤에는 나약한 인간의 방어기제와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외경이 숨어있다.

   복면가왕이란 프로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동물이 보호색으로 자신을 위장하듯 가면의 목적은 자기보호일 것이다.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그 누구를 유추하는 짜릿함이 있다. 가면에 의지하면 자신감이 더 생긴다. 가면이 주는 묘한 매력이 장수 프로그램의 이유다. 가면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내기가 벅찬 세상일까.

     

   우리는 모두 마음의 가면 하나씩 쓰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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