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다. 실크의 촉감이 이런 걸까. 아이스크림의 맛이 이럴까. 가슴이 녹아 내려 엄지발가락까지 닿은 듯하다. 묵직한 저음의 베이스 바리톤이 이렇게 청자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단 말인가.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터트롯 2' 길병민 성악가의 '낙엽 따라 가 버린 사랑'을 시청할 때의 감동이다.
도입부에서 저음의 바이브레이션은 아이스크림에 진한 에스프레소를 끼얹은 달콤 쌉싸레한 아포가토를 맛보는 느낌이다. “아하하하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부분에서의 고음 처리 한방은 호두 속 미로를 다 긁어낸 듯 개운하여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레이지보이에 잣바듬히 기대어 들을 노래가 아니었다. 내 나름으로 갖춘 예의라고나 할까. 성악가로서 타 장르 오디션에 도전하는 자세는 한 음 한 음 트롯형꺾기 기법을 연구한 흔적과 노력이 엿보인다. 노래 한 방에 이렇게도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올 하트가 아니다. 타 장르부의 저승사자라고 일컬어지는 ‘알고 보니 혼수상태’가 하트를 주지 않은 것이다. 이유인즉슨, 한 방이 없다는 거다. 도입부터 결미까지 모두 방인데, 굳이 한 방이 필요할까? 굳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줘야 한 방인가. 경력이 화려한 이름 석 자의 압축 파일을 풀면 수많은 문장이 쏟아지겠지만, 심사에서는 공정한 잣대가 필요하다. 흡사 피학의 마조히스트처럼 가방끈이 긴 출연자에 대한 열등감 작열이 아닐까. 아님 대원군 코스프레라도 하는걸까. 타장르 쇄국 심사!
나에게는 누가 뭐라 해도 원 픽이다. 행복하던 그 달콤함이 순간 분노 게이지가 옥상까지 뛰어 오를 기세다. 혼수상태는 국보급 성악가의 기세를 확 꺾어버렸다는 만용과 객기에 콧노래 부를지 모르지만, 아마도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는 나처럼 잠 못 드는 밤일 것 같다. 타 장르도 인정해 주는 넉넉함이 아쉽다. 트롯 장르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기회이기도 하다. 나는 그날 밤 완전 혼수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