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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진 Jan 09. 2023

다산의 죽란시사(竹欄詩社)를 생각하며


환하다. 거실에 나비가 백만 마리 날아 앉은 듯 호화찬란하다. 과장법과 비유법으로 살짝 버무렸다고 누가 딴죽을 걸 것인가. 노랑, 하양, 인디언 핑크, 라벤더색이 다투어 봉오리를 터트린다. 내가 이렇게 행복에 겨워도 될까. 홍콩 도교 사원 관상가는 나의 말년이 “GOOD"이라며 엄지를 치켜들었으니, 드디어 나는 꽃에 파묻혀 살 말년이 되었나 보다. 


     


둘째가 승진해서 축하 난이 속속 배달된다. 아들이 꽃을 좋아하는 어미를 위해 본가로 보낸 것이다. 끊임없이 배달되는 축하 화분을 받아들이며 그 관상가가 뭘 좀 안다고 믿어주기로 한다. 


    


전에 남편이 승진했을 때는 절대로 축하 화분을 집에 가져오지 말고, 모두 직원들에게 한 분씩 나누어 주라고 했다. 백 여분 되는 직원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도 남아서 뒤늦게 몇 개 가져왔지만, 키우기가 까다로워 빈 화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이번에는 한 사무실에서 둘이 동반 승진을 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렇고, 나도 이제는  화초 키우는데 이력이 났고 난 화분 관리법도 익혀서 나름 자신이 생긴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리란 생각이다. 우선 중간 크기의 난석을 18L 4포대를 주문했다. 화분을 살펴보니 커다란 화분 10/7을 스티로폼 조각으로 채우고 꽃 핀 서양란을 포트 채 박아 넣고 꾸민 화분이다. 화분을 뒤집어엎고 포트 비닐도 제거하고 뿌리를 정리한 뒤 새로 산 난석을 깔고서 심었다. 골고루 꼭꼭 채워 눌러준다.


 장식으로 곁들인 화초는 물을 좋아하는 것이므로 따로 심었다. 그제야 화초가 생기를 찾는다. 난방 온도가 25도이므로 스프레이를 자주 해 준다.  


    


그나마 동양란은 제대로 심겨줘서 그대로 한 달에 한 번 물만 줄 요량이다. 동양란이 적응을 잘한다. 옆에 싹도 나오고 꽃대도 올라오고 연두색 잎도 키를 키운다.  


     


문득 다산의 죽란시사가 떠오른다. 죽란시사는 정약용이 이웃에 사는 남인계 선비들과 조직한 친목 모임이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또 한 번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 등을 준비하여 시를 읊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또 아들을 낳으면 모이고, 수령으로 나가면 모이고, 벼슬이 승진되면 모이고, 자제가 과거 급제하면 모이는 등 주선한 사람 이름과 규약을 적고 제목을 ‘죽란시사 첩’이라고 했다고 한다. 


     


필자도 죽란시사 흉내를 내 보기로 한다. 마침 화분 대신 과일 바구니를 보내는 이도 있으니 대접하기 안성맞춤이다. 몇 번 손님을 치루고 나니 집 안이 정리되고 깨끗해졌다. 자고로 집안이 깨끗해지려면 손님이 자주 와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옛말 한 말 틀린 게 없다. 연말 연초를 잔치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누군들 아들과 새뜻한 추억이 없을까만, 꽃을 보니 아들 생각나서 운전석 엉따에 앉은 듯 전신이 따땃해오고, 오장이 말랑해진다. 

영혼의 비타민에 파묻혀 있으니 건강에 대한 자신감은 뿜뿜! 

꽃 속의 나는 오늘도 엄지 척한 모정의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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