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숙진 May 28. 2024

수당 이남규 고택(古宅)을 찾아서

(퇴계학 진흥회 전통문화유적 예산 한산이 씨 고택 탐방)

목은 이색의 후손이던 예산의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한산(韓山)이 씨 고택을 찾았다.

국가 중요 민속문화재 제281호다. 목은 이색의 10대손  이산해(李山海)의 손자 이구(李久)의 부인이 인조 15년에 그의 조부 묘소 근처인 이곳에 건립 후 헌종 12년에 중건한 고택으로 한말의 지사 이남규의 생가이다.

지세에 따라 높은 곳인 동쪽에 안채를 서쪽에 사랑채를 병렬로 배치했다. 사랑채는 ㅡ자형으로 안채는 ㅁ자형이다.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 및 평면 구성에서 이 지역 반가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사랑채는 담이 없이 완전 개방형이라 앞에 소나무가 아주 멋지게 수형을 잡아가며 가리개 역할을 하고 있다. 오른쪽엔 탱자나무가 빳빳이 서 있는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듯하다.



 고택사랑채 마루에 출입문 위 공간에 검은 바탕에 흰 글자의 편액이 보인다. 편액이라 하면, 필자의 고향집 일성당 별채 '종산정사'가 떠오른다. 검은 바탕에 흰색 한시가 양각된 편액이 걸려 있어서 어린 마음에 무척 창피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고택은 기둥마다 일곱 자 주련이 걸려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주련은 시구나 문장을 종이나 판자에 새겨 기둥에 걸어둔 것을 일컫는다. 평소 건물의 주인이 아끼고 좋아하는 다섯 자 혹은 일곱 자 대구(對句)를 이루는 문장이나 한시를 사용한 경우가 많다. 공부가 부족해 주련을 일일이 소개하고 설명하지 못하는 애석함이 크다.

 

  

일행 중 질문이 쇄도한다. "저기 저 천정에 동그란 것은 뭣인가요?" "들어 열개라고 합니다."주최 측에서 시연까지 하면서 친절한 대답을 준다.

전면에 4 분합 띠살문 들어 열개를 달았고 후면에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옛날 서당으로 쓸 때는 문을 들어서 천정에 걸던 쓰임새로 달아 놓은 기구다.

"저기 쌓아놓은 찻상 같은 건 뭣에 쓰나요?" "이 마루에서 한학 강의가 있어서 책을 얹고 공부하던 책상인데, 준비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라는 고택 장손의 말씀이다. 마루도 이층 구조로 되어 있어 쓰임새가 많을 것 같다. 좌식 생활의 불편함을 미리 예견한 설계인가 해서 감탄한다.

(퇴계학 진흥회원 이기춘 님 사진 차용)



 마침 수당가 장손 이문원 교수(중앙대 명예교수. 전 독립기념관 관장)께서 연락받고 오셨으니, 모두 사랑채 마루에 정좌하고 그의 설명을 듣는다.


"이 집을 지으신 저의 조상 할머니께서 여장부 스타일이셨던 같습니다.

스물둘에 청상이 된 전주이 씨 이효숙 할머니는 여든 살을 넘게 살면서 남편과 아들 대신 집안 살림을 주관하셨어요. 시댁이 주관하던 북인의 시대가 끝났지만, 다시 집안을 중흥시키는 발판을 마련하셨지요."

이 수당 고택과 번성한 자손들은 이효숙과 그녀의 자부 평산신 씨 두 여인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로 이룩한 업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당 이남규 선생이 서울로 압송도중 살해 당한 이야기를 눈을 지그시 감고 차근차근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하신다.  


"사가살불가욕(士可殺不可辱)"

한산이 씨 수당 이남규 선생은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이를 규탄하는 '청절 왜소'라는 상소문을 썼고, 을사늑약 '청토적소'등의 상소문을 일제의 만행을 나라에 알렸다. 그는 구한말 홍주 의병장 민종식 장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혐의로 공주 감옥에 투옥되었단다. 그 후 일제가 회유하자 "죽으면 죽을 것이지 내가 굽힐 것 같으냐? 선비는 죽일 수 있되 욕보일 수는 없다.(士可殺不可辱)"라고 호통쳤다고 한다. 수당이 실천한 고귀한 정신이다.

그 후 1907년 9. 26. 일본 기마대를 파견하여 서울로  압송하던 도중 온양 평촌 냇가에서 수당 선생을 살해하였으며, 이를 막던 아들 이충구(李忠求)도 함께 살해했다고 한다. 모시고 가던 하인 한 명은 내장이 다 터져서 밖으로 튀어나온 채로 살아있어서 생생한 현장을 증언했다고 한다. 주검을 수습하는데, 손가락 하나를 찾을 없었다고 하니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을지 짐작이 간다. 일제의 만행에 모두 분노에 차서 코끝 단속하기 바쁘다.


  이 고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당 이남규 같은 충절인물을 배출하는 등 건축적 역사적 가치가 크다. 17세기 이후 생성된 다량의 고문서와 집안 유물들은 수당가의 변화와 조선 후기 사회 경제 상황의 실제를 잘 보여주는 사회 문화적 가치도 크다.


 

   굴뚝이 유난히 낮은 이유는 외부에 연기가 안 보이게 하느라 반가에서는 그렇게 낮게 설계를 했단다. 식량이 부족해 끼니를 잇지 못하는 이웃이 많은데, 유독 자기 집만 연기를 피우기 미안해서 굴뚝을 낮게 설계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정신적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다.

안채 앞에 있는 행랑채는 2칸의 중문을 중심으로 동측 칸은 헛간이고 서측 2칸은 청지기방이다. 안채 들어가는 대문은 타원형이다. 시절에 대단한 첨단 디자인이다. 전체 배치로 ㄷ자형의 안채에다 ㅡ자형의 행랑채로 트인 ㅁ자형이다. 부엌이 칸으로 안방옆에 붙어 있다. 우측 세 칸의 헛간과 행랑채는 현재 남녀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정원수가 아주 잘 가꿔져 있다. 장손어른이 조경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 같다. 석불을 안고 있는 나무는 몸통을 거의 내주고도 꿋꿋이 잎을 활짝 피워내는 걸 보니 그야말로 석불의 힘인 것 같다.

나오는 길에 전주 이 씨 자부 평산 신 씨의 지문을 보고 한 컷 담았다. 두 여인의 활약상을 보면, 이 고택 터가 대장부 여인들이 가문에 들어올 아주 길한 터인 것 같다.


고택 바로 앞에 주차장도 잘 마련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잘 가꿔진 조경수를 마음껏 즐기다가 수당 고택을 빠져나온다.


작가의 이전글 아산 외암(牙山 外巖) 마을 방문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