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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진 May 30. 2024

아산 맹 씨 행단(牙山 孟氏 杏檀)

(퇴계학진흥회 전통문화유적 맹 씨 행단 탐방)


조선 초기 세종 때 영의정이던 맹사성이 살던 고택이다.  검소한 생활과 원칙에 철저한 학자로 명성을 높인 청백리다. 맹 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 씨 행단"이라 부른다.


흔히 맹 씨 행단이라 하면, '흑우 타고 옥피리 부는 맹사성'을 떠올린다. 한적한 자연 속에서 음풍농월로 유유자적 세월 보내는 선비님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강호사시가는 고등학교 기출문제로 나올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난 시조로 알려진다. 


일찍이 퇴계 이황의 시에서는 "인간에게 무엇이 최고의 행복일까?"라는 담론이 비친다. 

 "과학을 통해 자연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 행복일까, 자연 속에서 성찰하고 인격적으로 완성하여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이 행복일까? 

소고기 맛은 부위별로 하나하나 분석하며 소를 맛있게 먹는 것이 행복일까, 소의 등에 타고 피리를 불며 소와 함께 노는 것이 행복일까?" 

이 행복론은  맹사성과 일맥 상통하는 성찰이 아닐는지. 



맹 씨 고택은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에 무민공(武愍公)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崔元直)이 건축하였다고 전한다. 실제로 최영이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최영의 손녀사위인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가 전란을 피하여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은거하였다. 


최영 장군은 칼의 예기로 살았고, 맹사성은 붓의 부드러움으로 살았으니, 문무가 공존하는 상서로운 터가 아닐까 한다.

 

고택은 고려시대의 귀중한 건축물로  맞배지붕이다. 

대청의 문을 모두 열어 걸쇠에 걸어서 활짝 열어 놓았다. 문이 바로 천정인 듯 반듯하게 걸려있다. 마루의 뒤창을 열면 시원한 맞바람으로 통한다.


정면 4칸 중 2칸의 대청을 두고 툇마루를 달고 좌우에는 각각 3칸짜리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과 툇마루는 우물마루(井) 방식을 따랐다.



고택 정면 창호의 독특한 형식인 정자살의 형태와 두터운 문틀이 인상적이다. 어느 객의 고단한 뒷모습은 초상권 침해가 아닐듯하여 잘라내기를 하지 않았다.



행단(杏檀)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당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고택 뒤편 언덕에는 맹사성이 황희, 허형과 함께 각각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은 구괴정(九槐亭)이 있다.




고택 옆 '세덕사(世德祠)라는 사당은 맹사성의 부친 맹희도와 조부 맹유를 모신 사당이다. 



고불 맹사성 기념관 영상실에서 영상을 감상하고 기념관에 들어서니 고불정신 다섯 가지가 적혀있다.

고불 정신은 충효정신(충성 효도), 청백정신(청렴결백), 충신정신(성실 신의), 접례정신(겸손 예의), 수절정신(절의 수분)이다.


(맹사성 영정)


신창 맹 씨의 유래는 중국 노나라에서 계출 된 성씨로 맹자 40 세손 맹승훈이 당나라 말 공자의 상(像)을 모시고 신라로 이주해 온 것에 기원하여 한국계 시조로 삼고 있다.

맹사성 선생의 본관인 신창(新昌) 맹 씨는 고려 이부전서를 지낸  맹의를 1 세조로 하여 맹사성은 맹의의 4 세손이라고 한다.

아버지 맹희도와 권근은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고, 맹사성은 권근의 문하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실제 내린 글씨를 후손들이 현판으로 새겨 만든 '어필사액현판'을 본다. 

충효세업(충과 효를 대대로 힘써 오다)

청백가성(청렴과 결백을 가문의 명예로 삼다)

가히 가문의 영광이니 대대로 고이 간직할 글씨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문불출 ' 이란 말이 생긴 유래다. 맹사성 조부가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으로 두문동에서 순절하자 아버지 맹희도는 모든 벼슬을 버리고 온양으로 거처를 옮겨 후학을 양성했다.

고려 말 권문세가 가문과 왕족 중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에게 항복하지 않고 벼슬을 거부한 채 은거한 곳이 두문동이라 하였고 지조를 지키다 모두 순절하였다. 오늘날 집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하게 된 고사성어가 생겼다. 그런 슬픈 사연을 알게되니 씁쓸하다 .


기념관을 나와 멀리 앞산을 조망하면서 탁 트인 공간에 집은 작게 짓고 나무는 크게 심었다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이 타인을 위해 나무를 심는 사람의 마음처럼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정치가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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