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甲辰年) 구월의 끝 날이다. (사)퇴계학진흥회에서 「학봉역사문화공원」 개원식에 참석하는 날이다. 새벽같이 눈을 비비고 운동화 끈을 조이고 나섰다. 종합운동장 2번 출구로 올라서자, 우리 버스 세 대가 번호표를 달고 기다린다. 하늘이 유난히 맑은 날 코스모스가 살랑거릴 들길을 생각하며 마음은 벌써 고추잠자리가 된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김밥과 떡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한 후 학봉 선생의 후손인 김언종 교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요순(堯舜)과 걸주(桀紂)에 대한 이야기다. 성군이라는 평을 듣고 싶은 선조가 “나를 과거의 왕들과 비교하면 누구와 비숫한가?” 하고 물으니 어떤 신하는 “요순과 같은 임금이십니다.”하는데, 학봉 선생이 이르기를 “요순이 될 수도 있고 걸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요순과 걸주가 그렇게 비슷한가? " 하니 학봉 김성일이 이르기를 " 잘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친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천부적인 자질이 고명하시니 요순처럼 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똑똑하게 여겨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병통이 있습니다. 이는 걸주가 멸망한 이유가 아닙니까? "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이 벌벌 떠는데, 류성룡이 아뢰기를 “두 사람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 같다는 말은 임금을 격려하는 말이고, 걸주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은 경계시키는 말입니다.” 해서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다. 김교수님은 한 마디로 학봉 선생의 강직하고 용기 있는 성품을 나타내는 좋은 예를 알리는데 주력하신 거다.
학봉역사문화공원은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학봉 종택 건너편에 있다. 우리 일행은 정확히 11시 식장에 도착했다. 줄을 서서 미리 준비한 방명록 서명 표를 내고 '학봉선생기념사업회'에서 준비한 책자를 받고 야외식장에 착석했다. 요즘 따라 미세먼지도 없고 쨍쨍한 햇빛에 눈이 부셔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뜰 수가 없다. 주최 측에서 햇빛 가리개 모자를 의자마다 준비해 뒀으나, 의자에 앉기는 엉덩이가 화상을 입게 생겼다.
포토존이 보인다. 학봉 선생의 임란 중 활동 경로와 각 고을의 인물을 표시하고, 선생에 대한 <선조수정실록> 기사와 <퇴계선생 언행록>의 기록을 실었다. 선생이 쓰시던 안경의 모양으로 포토존을 만들었다고 한다.
공원 상징 조형물이 특이하다. "구국을 위한 불꽃이 뜨겁게 타 오른다." 경상도 임란 의병의 자주국방 정신은 봉화처럼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작품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의병에 동참한 백성의 모습과 왜군과의 전투 장면을 나타내고 , 의병봉기에 앞장선 선비정신을 두루마리로 표현했다. 불꽃 형상은 의병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봉화를 의미한다.
김종길 학봉 종손이 사회를 보는데, 내빈 소개가 구수하고도 달변이시다. "시집가는 날 등창 난다더니, 하필 오늘~~ " 로 시작한 불참러의 변명이 장황하다. 참석하신 분으로는 김병일 도산서원장과 경북 전통 유교문화 경북 상조재단이사장과 경북 유림화합과 성균관 유도회장, 이용태 공원관리 사단법인 학봉 기념사업회장, 등등 끝없이 이어진다. 기획 후 10년 동안의 사업이었으니, 심혈을 기울인 분들도 많겠지. 내리쬐는 햇빛에 못 견디고 빠져나온다. 시간이 아까워서 돌아다니며 사진 찍다가 건물 그늘로 숨어들었다.
효제충신석은 학봉선생의 친필 유훈(遺訓)을 집자하여 새긴 옥돌(玉石)이다. 효제충신은 어버이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임금에 대한 충성, 벗 사이의 믿음을 뜻한다.
/ 사제문비(賜祭文碑)는 1609년(광혜원년) 8월 23일에 국왕은 예조좌랑 이천추를 보내어 학봉의 사당에 제문을 내리고, 학문과 충절을 기렸다.
(아래 한글로 풀어쓴 제문)
아아, 영혼이여/하늘이 낸 인중호걸이요/산악 정기 타고난 신령스러운 사람/덕 갖추고 학문 뛰어나/우뚝하게 드러난 명신이라네/왕명을 받들어 사신을 가서는/섬 오랑캐의 넋을 빼앗았고/초유의 대권 받들고 왜적 토벌할 때는/참 선비라 맞설 적이 없었네/몸을 내던져 전장을 달리기를 목숨이 다해서야 그만두었네/황천에서 다시 일어나기 어려우니/삼군을 이제 누구에게 의지하리오/간략하게 포상하는 은전을 내리나/어찌 그대의 공에 보답할 수 있으리오/내가 왕위를 이어받고 제일 먼저/그대의 의로운 충정 생각하였네/천리 먼 길 제관을 보내어 /조촐하게 제수 차리고 잔을 올리니/영혼이 계신다면/부디 와서 흠향하시라.
서산재는 서산 김흥락선생이 이곳에 3칸 초옥으로 <서산재>를 짓고 침잠 사색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1895년 서산 선생이 의병 창의를 결심한 을미의병의 발상지이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요람이기도 하다. 서산은 을미의병의 최고 지도자였다. 이런 역사적 의미를 담아 교육장을 서산재로 이름 지었다.
임란역사관은 학봉 선생의 생애, 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학봉 선생의 연보, 임란 의병에서 독립운동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 의병 정신의 계승, 학봉 학맥도 등이 요약 전시되어 있다.
식장을 옆으로 조금 비껴 나면 '호국이야기 길'이라는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왼편 언덕배기에 장중한 서예 작품이 걸려있다. 학봉 선생이 임진년 5월 처음 촉석루에 올라 진주성 사수((死守)를 다짐하며 지은 시 <촉석루 중 삼장사>를 쓴 시다.
<위 서예 작품, 김언종 교수님 해제>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 촉석루 위 세 장사(김성일, 조종도, 이로)
一盃笑指長江水(일배소지장강수) 한잔 술 비장한 웃음으로 장강물을 두고 맹세하네
長江之水流滔滔(장강지수류도도) 장강물 쉬지않고 도도히 흐르듯이
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 저 파도가 마르지 않는 한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
운장각은 학봉 선생의 유품과 문화유산을 보관하기 위한 곳이다.
학봉문화공원에서 학봉선생구택으로 가는 도로변에는 기대했던 코스모스도 한들거리지만, 하늘의 구름이 더 예쁘다. 이 구름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리고 새벽잠을 설친 보람을 느낀다.
종택에 들어서자 마당에 파란 잔디가 한눈에 들어온다. 잔디 가꾸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 수고가 돋보인다. 필자의 지인 중 K교수는 은퇴 후 충남에 삼백 평 대지를 사서 집을 짓고 잔디를 깔았는데, 한 두 해까지는 자랑 겸 초대해서 오디 따먹고 서로 시커먼 입술을 보고 웃어제키고 했는데 그후 뜸해졌다. 잔디 관리하다 병이 나서 결국은 시멘트를 부어버린 사태가 생기고 말았던 거다. 열흘 정도 여행 갔다 오면, 풀이 사람 키만큼 자라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당 잡초 뽑다가 건강이 안 좋아져서 이제 손님 초대도 못한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 종택의 잔디를 보니, 주인님의 노고가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잡초 한 포기 없는 잔디를 보면서 저절로 존경이 간다.
풍뢰헌은 학봉 선생의 장손 단곡 김시추 공의 강학지소로 종택의 당호로 불린다. 1990년 중건하였다.
학봉 종가의 배려로 도시락을 들고 종가 영모제에서 식사하면서 여러 참석자와 수인사(修人事)를 하게 되었다. 종가에서 준비한 빨간 식혜도 대접받는다. 유년의 맛이 바로 엄마 맛이니 얼마나 반가운 맛인가. 식후 디저트로 아주 깔끔 담백하다. 수고하신 그 손길에 감사드린다.
학봉 기념관은 2009년 건립한 운장각 소장 문화재의 상설 전시관이다. 내부에서 귀한 자료 몇 컷 찍었다.
위의 각띠는 관복을 입고 관복 위에 두르던 띠로 학봉이 사용하던 것이고, 가죽신은 학봉이 착용하던 가죽신이다. 유서통(諭書筒)은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된 학봉이 왕의 유서((諭書)를 넣어가지고 다니던 통. 양쪽 끝에 고리가 있어 등에 멜 수 있게 만들었다. 왕명을 받든 문서가 들어 있어서 누구도 손댈 수가 없는 불가침의 통이다.
학봉 선생의 초상화다. 옛날에는 저 수염이 권위의 상징이었을까, 아님 남성성의 위용을 나타내는 심벌이었을까. 식사할 때는 거추장스러웠을 것 같다.
보통 사찰 근처에나 서식하는 줄 알았던 꽃무릇이 종택 마당에서 키를 자랑하고 있어서 놀랐다. 어릴 때 보던 탱자를 보니, 하마하마 그 향에 취해 가슴이 뭉클하다.
담장밑의 아기자기한 꽃이 정스럽고, 탐스러운 맨드라미는 고향집 장독대가 생각난다.
자동으로 시 한수를 읊조리게 된다.
꽃무릇 길게 빼어있고
탱자향 그윽한데
맨드라미 붉은빛을 보니
어느 새 유년의 고향이
눈앞에 있네.
우리는 상경 버스에 올라 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들판을 만끽한다. 간식으로 술이 한 순배씩 돌아가는데, 안주로 나온 말린 가오리찜이 아주 인기 폭발이다. 가오리가 맛있어 필자의 임계점인 소주 두 잔을 마셔버렸다. 뭣이 걱정인가. 졸리면 자면 될것을.
한잔 하신 이장우 교수님께서 주변국의 빨라진 문화 발전에 격세지감을 느꼈다시며, 해학과 풍자를 섞어서 한 마이크 하신다. 차내 회원들도 모두 유쾌하여 통쾌한 웃음을 날린다. 어울렁더울렁 대물리며 살던 집성촌을 떠나 살던 재경회원들은 각자 정든 둥지를 찾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