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는 시대의 온도계

LA 헐리우드 볼(Hollywood bowl)공연장

by 소봉 이숙진



대중문화는 시대의 온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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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를 만나면 기대와 설렘이 배가된다. 나는 익숙한 것보다 낯선 것에 더 열광한다. 대중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 중에도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의 켜로서의 문화 이야기를 좋아한다.

오늘은 LA의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에 와 있다. 달뜬 흥분이 쉬 가라앉지 않고 살짝 주눅이 든 상태다. 18,000석 야외 공연장이라는데 주차장이 그리 크지 않다. 일자 주차를 해서 뒤차가 빠져야 나갈 수 있게 빼곡히 정렬된다. 뜨악한 내 표정을 읽은 아들이 씩 웃는다. 모두 관람객이라 같은 시간에 나오니 문제가 없다고 나를 안심시킨다. 우리네 문화에선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렇게 퍼즐 놀이하듯 다닥다닥 차를 대니 좁은 공간에도 그 많은 차가 주차할 수 있다. 그 발상이 가히 쓸 만하다.

공연장에 들어선 순간 일단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란다. 우리 좌석은 중앙에 위치한 이 층 첫 번째 줄인데 35불이다. 장애인 우대라서 값에 비하면 너무나 로열석이다. 남편이 고관절 골절 치료를 받은 뒤라 주차장에서 걸어 올라가는 길이 좀 멀다고 지팡이를 짚고 갔기 때문이다. 미국 관광길에서 가장 본받을 점이라고 느낀 것이 장애인 우대 정책이다.

디즈니랜드에서도 안내원이 자기 부모 마중하듯이 뛰어나와 부축해서 간이 문으로 들여보내 주니 덩달아 일행 모두 지팡이 덕을 톡톡히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은 긴 줄에 미안한 마음 가득했지만, 바라보는 이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당연시한다.

돈을 많이 낸 사람들이 들어가는 입구도 다르다. 그들도 긴 줄을 서지 않고 바로 들어간다. 노천의 불꽃놀이에도 귀빈석 의자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의자가 여럿 비어 있음에도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는다. 무심코 빈 의자를 흘끔거린 내가 쥐구멍을 찾을 따름이었다.

우리 앞에 네 사람이 앉는 칸막이 테이블은 500불이란다. 그런가 하면 맨 뒷자리는 10불이라고 하니 융통성의 진수를 보는 날이다. 같은 값이라도 앞이 탁 트이고 넓은 자리는 장애인에게 양보한다.

"So what?"

“그래서 어쩌라고?”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문화에 모두 당연하다는 듯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앞자리 테이블에선 물너울처럼 넉넉한 웃음을 보이며 와인을 마시는 노신사들이 나를 매료시킨다. 아무리 아라리 가락처럼 진양조장단으로 흐르는 노을이라 한들 이들보다 더 아름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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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LA 도심 사거리에서 좌회전할까 말까 망설일 때, 대각선에서 우회전 대기 차량에서 창을 열고 백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수신호를 해 주던 로맨스그레이에 마음 적신 일도 있지 않았던가. 내 마음에 은은히 번지는 그들의 노을빛 삶이 내 망막을 붉게 물들인다.

한참 이런저런 상념에 젖었다가 바라본 무대 조명이 현란한 무지갯빛이다. 엘에이 팝 오케스트라와 음악에 따라 춤추는 불꽃 축제는 낭만의 여름밤을 수놓는다.

섹슈얼한 여가수 주월이 공기 반 콧소리 반으로 흐느적거리자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드높아진다. 가창력은 우리네 가수보다 떨어지지만, 관객과 하나 되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에게는 무대 위의 배우보다 관람객의 매너가 더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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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나고 차 앞에서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벌써 각시 눈썹 같은 가느스름한 초승달이 삐뚜름하다. 왁자한 악다구니를 상상한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잣대를 비웃듯이.

맨 뒤에 차를 댄 사람은 서둘러 내려왔으리라. 그들에겐 기다림도 즐거움이다. 자기 차 옆에 서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모습은 빨리빨리 문화에 길든 나로서는 경이롭다. 그 많은 차는 순식간에 썰물처럼 리드미컬하게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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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는 시대의 온도계라고 했던가.

자유경제 민주주의 문화가 빚어낸 신사도와 여유를 체감한 날이다.

하긴 선진국에 오는 목적은 고급문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닐까.

법이란 만듦새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지고, 문화의 만듦새에 따라 개개인의 인성도 달라진다는 앎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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