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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 각시탈

공무원연금수필문학상 작품

by 소봉 이숙진

하회 각시탈



입술이 샐쭉하다. 봉긋한 두 볼에 갈색 연지가 설핏 웃음을 부른다. 이마에는 볼연지보다 더 큰 곤지가 태극 문양처럼 도도하다. 아래로 살포시 내리깐 실눈이 조신하고, 정수리에 얹힌 여섯 타래의 머리가 정갈하다.

큰아들 결혼 때 태평양을 건너온 아들 친구 두 명에게 선물할 하회 각시탈 산 것 중 남은 하나다.

이 탈을 어디에 걸까 한참 망설이다가 안방 침대 맞은편에 걸기로 했다. 입 옆에 근육이 선 것으로 보아 좀 억센 듯해서 쳐다보다 머쓱해지기도 한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넣어 주면 특유의 나무 냄새가 난다. 불현듯 남편과 뒷산을 산책하던 날의 풀 냄새가 소환되니 느껍다. 우북한 옥잠화 잎들이 투덕투덕 흩뿌리는 비를 맞아 너울거리고, 덩달아 연보랏빛 꽃들이 통통 춤을 추던 날이다. 예쁘기도 하지만 냄새가 풋풋하여 슬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행복하거나 기분이 좋을 때 하는 짓이다. 그 아릿한 장면을 기억하게 하는 탈이니 더욱 애착이 간다.

그렇게 산책을 좋아하던 남편이 주방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로 입원했을 때, 잠시 방심한 사이 잘못된 주사 처방으로 의료사고가 났다. 왈칵왈칵 구토하다가 기도로 넘어가니, 결국 집중치료실로 옮겨 기도삽관을 하고 말았다.

달소수 잠만 자는 그를 보는 충격으로 돌 심장이라고 자신하던 내 시스템도 퓨즈가 끊어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온갖 의료기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처참함은 형용사 한두 개로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차라리 말을 못 하는 게 잘된 일이기도 하다. 당시 상황은 손 안의 지폐는 검불에 지나지 않았고 내가 쓴 글 나부랭이 따위는 부질없었다.

곤히 잠든 그의 옆에 퍼질러 누웠다가 갑자기 숨결이 조용해지면 실눈을 뜨고 훔쳐본다. 그의 관자놀이가 여리게 움직인다. 옳거니! 내 옆에서 숨만 쉬어줘도 애오라지 이렇게 고마운 것을.

지금은 상 남자가 대세라지만, 젊은 날 약주 한잔 걸치고 코를 골기 시작하면 이마를 찡그리며 상스럽다고 마뜩잖게 여긴 일이 얼마나 사치한 응석이었는가. 고열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가슴은 쩍쩍 빗각을 그으며 터진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어느 날 아들아이에게 맡기고 어슬녘에 집에 들어와 비몽사몽간에 잠이 들었다.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거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환청처럼 조곤조곤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에 불을 밝히니 각시탈이 피로에 지쳐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홍콩 도교 사원 관상가는 내가 산통에서 뽑은 숫자가 good라며 엄지를 치켜들고 변죽을 울렸는데, 빗금 진 마음결 하나 메우지 못하는 걸 보면 다 헛것인가 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심술로 애꿎은 탈을 툭 치니, 방바닥에 헤딩하며 나를 발칙하게 노려본다.

목각은 유난히 광대뼈가 불쑥 튀어나와 보였다. 눈꼬리는 댓 자나 내려와 있고 콧구멍도 없는 답답한 모습이 영락없는 지금의 내 모습이다.

언제 하회탈 제작자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제발 코에 구멍 좀 내 달라고 사정하고 싶을 지경이다.

결국,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두어 달을 병원에서 보낸 뒤 퇴원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남편은 천사표 나이팅게일을 원한다. 늘 갈색톤을 즐기는 내가 알록달록 밝은 색 홈웨어를 사들였다. 내가 지치지 않고 우울감에 빠지지 않으려는 최면 요법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할 수 있다. 아자~ ” 하면서 야무진 다짐을 해 보지만, 허한 마음속에 헤적이는 스산한 바람 앞에서는 번번이 휘뚝거리게 된다.

내팽개친 탈을 다시 걸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잔잔한 미소를 띠며 겨울 눈밭의 나무처럼 초연하다. ‘이 눈 내린 들판에서 죽는다면 나 역시 눈부처가 되리.’라던 초수이의 하이쿠 한 줄이 떠오른다.

탈의 표정이 시시때때로 변한 건 내 마음의 눈이 변덕을 부린 거다. 내 주관적인 견해로 사물을 바라보니 그럴 수밖에.

아직은 시시포스(Sisyphos)의 노동처럼 나의 손길을 끝없이 요구하지만, 때가 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비가 온 뒤 아름다운 무지개가 서듯이 나의 인생 이모작에도 쨍하고 해 뜰 날이 기다릴 것이다.

물색없는 주부는 각시탈 옆에 볼품없는 편액 하나 내다 건다.


‘나는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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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연금수필문학상 작품이 게재된 공무원 연금지 10월호가 도착했다.

기록으로 남기고자 작품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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