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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남편

by 소봉 이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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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창궐로 고향길이 막혔다. 일 년에 두 번 명절에나 부모님을 찾아뵙는 고향이지만, 올해는 모두 고향행을 포기했다. 혹시라도 부모님께 바이러스를 퍼트릴까 봐 염려하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모두 서울에 거주하고 있지만, 명절 음식 준비보다 집 안 청소와 소독에 집중하게 된다. 방마다 이불을 모두 세탁하고 탈취제를 뿌리고 물을 끓여 그릇과 수저를 소독했다. 며늘아기가 차례 준비는 다 해 온다지만, 방역에 신경 쓰다 보니 미리 방전되어 헉헉댄다.

모든 국민이 이런 어려움에 부닥친 시점에 주요 재상의 남편이 요트를 사러 미국으로 떠났단다. 참으로 철없는 남편이다. 사회 거리 두기 관계로 소상공인들이 줄도산하는 판국에 “만날 집에만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욜로(YOLO)족을 선언했다. 한낱 장삼이사, 갑남을녀라도 이런 코로나 팬더믹 시점에서는 거리 두기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그는 공인의 가족이 아닌가. 전시와 버금가는 코로나 19로 전 국민에게 해외여행 자제를 명한 사람의 남편이 취할 행동은 아니다. 좋게 말해서 자유로운 영혼이다. 이 철없는 남편으로 인하여 그 부인은 직을 물러나야 할 위기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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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남편 하면 생각나는 한 분이 있다.

박목월 선생님은 내 결혼식 주례를 서 주신 분이다. 그때 한양대학교 문리대학 학장으로 계시던 선생님은 주례 선물을 절대 사 오지 말라시며, 인사 올 때 봉투에 결혼사진과 일만 원만 넣어서 가져오라고 하셨다. 문리대 도서관에 책을 우리 부부 이름으로 사서 앞표지에 우리 결혼사진을 넣는다고 하셨다. 그때는 요즘처럼 돈 봉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신혼여행 가서 선물을 사서 인사를 가는 게 관습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더욱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년 후 1978년 3월 24일 62세로 이 세상 소풍을 마치시니 문단의 큰 손실이었다.


그 후 선생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가 소개되었다.

선생님이 중년이 되었을 때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가정과 명예, 교수직도 다 내려놓고 잠적했다고 한다. 부인이 수소문 끝에 제주도에 있다는 걸 알고 찾아가서 돈 봉투와 겨울옷을 내놓으며, 여대생에게 고생이 많다고 했단다. 선생님과 제자는 여기에 감탄하여 뉘우치며 이별을 결심하니, 그 유명한 가곡 ‘이별의 노래’ 가사가 이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바람은 싸늘 불어/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우리의 사랑도/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어느 날 밤에/촛불을 밝혀두고/혼자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나도 가야지


젊을 때는 선생님의 로맨스가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연륜이 쌓이면서 차츰 참으로 철없는 남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가정을 버리고 잠적까지 해야 했을까. 내가 존경했던 선생님이 그렇게 철이 없으셨다니 이성과 감성의 이분법으로 합리화해야 할까.

하지만, 목월 선생님의 철없음 뒤에는 사모님의 가없는 사랑과 지혜가 있었다. 사랑보다 더 귀한 인간의 도리를 깨달은 두 사람은 사모님의 사랑에 반성한 거다. 어느 재상의 남편은 온 국민에게 모욕을 느끼게 하고 아내도 배반하고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한 철없음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 나랏일을 하는 이에겐 필수 덕목이다.


목월 선생님의 지혜로운 부인은 철없는 남편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한 나라의 재상은 저 철없는 남편을 두고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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