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과 나는 오랜만에 일상으로 돌아왔다.
흡족하진 않았지만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장은 매일 나가지만 영업 실적이 부진하자
갑자기 우즈베키스탄으로 간다고 했다.
먼저 직장을 그만둔 선배가 무역업을 하는데
같이 하자고 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 말라면 안 간다고 하는데
그를 말리고 싶지 않았다.
매일 나가서 영업을 하는데 그가
가져오는 돈은 없었다.
아파트 분양대금, 생활비, 두 아이를 맡긴
대가로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 등을
모두 내가 부담하고 있었다.
교사라는 내 안정적인 직업 덕으로
당장 어려운 일은 없지만
그는 한 가장으로서 우즈베키스탄 아니라 시베리아라도 가서 돈벌이를 해야 할 형편이다.
돈이 필요하다기에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아서 1,500만 원을 마련해 주었다.
결혼 전 전셋집을 구할 때 시아버지가 마련해 주겠다는 1,000만 원도 받았는지
받았으면 어느 주머니로 들어갔는지 행방이 묘연하지만 이것저것 계산 할 때가 아니었다.
떠나기 전에 준비할 것이 많아 두 달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또 아기가 생겼다.
주성의 동생인 셈이다.
마흔을 넘긴 나이인데도 이 몸뚱이는 했다 하면 홀인원이다.
사랑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장을 향한 사랑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관계가 좋아졌을 때 둘이 경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둘이 탑돌이를 하다가 불전함에 돈을 넣고 이번에는 예쁜 딸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그렇게 울며불며 날뛰더니 어느새
그의 손을 잡고 빌고 있으니 말이다.
남자의 말과 태도로 이리저리 마음이 바뀌는 것이 여자의 마음인가 보다.
맹탕인 내 마음인가 보다.
나는 임신을 한 채로 그를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보냈다.
요샛말로 ‘우즈베키스탄에는 김태희가 밭을 간다’고 할 정도로 예쁜 여자가 많다는데
그 당시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임신한 아내 놔두고 거기서도 그런 짓하면 사람새끼가 아니라는 이모의 말을 들었을 뿐이다.
하긴 장이 처음 바람난 것도 ‘대단한 놈’인 주성이 임신했을 때부터라고 추정이 된다.
어쨌든 사랑을 회복한 여자에게 아무런 말도 쓸데가 없다.
오로지 가장으로 살아보겠다고 외국에 돈 벌러 간 남편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기를 가진 여자일 뿐이다.
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팩스로 편지를 보내왔고 나도 거기에 답장을 보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한편으로 부처님이 점지해 주신 아기라
피부에 좋다고 꾸준히 벌꿀도 먹고
모차르트 음악도 들으며 아름다운 시를 필사하고
새삼 구구단을 외우며 소품 만들기와 종이 접기에도 심취했다.
친정에서 윤아와 몇 달 후면 태어날 아기를 위해 종이접기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봉 주리 씨 계세요?
네, 전데요, 누구세요?
아, 저 P강사예요. 잘 지냈어요?
아니, P강사님이 웬일이세요!
나는 이제 지방 국립대 교수가 됐어요.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
그래요? 참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저는 결혼했어요.
그런데 왜 이 전화를 받지요?
괜히 그러는 거죠?
임신 중이라 좀 쉬려고 친정에 와있어요.
...... 그렇군요...... 알겠어요.
행복하게 잘 살길 빌게요.
네, P강사님, 아니, 교수님 되신 것 다시 축하드리고,
행복하게 잘 지내세요.
교수 부인이 됐을지도 모르는 나는
외국에 돈 벌러 간 연하의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다.
마흔한 살에 막내를 출산할, 폭풍우를 뚫고 온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