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누군가에게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들었다.
시절인연이란 불교의 업설과 인과응보설에 의한 것으로 사물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 시간과 환경이 조성되어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불교 용어로 인과 연이 합하면 생기고 흩어지면 사라진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무리 거부해도 인연이 생기고 맞지 않으면 맺기 어렵다고 하며 요즘은 때가 되면 일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도 쓰인다고 한다.
계속 ‘~한다. ~한다’라고 늘어놓으니 내가 이 말을 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다는 증거다. 지금은 내 멋대로 시절인연은 잠깐 스쳐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래 이어지지 않는, 영겁에 비하면 찰나의 만남들.
자주 같이 길을 걷다가 한동안 안 보이는 길벗들이 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다양한 일들이 있어서 안 나오고 못 나오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단순함 뒤에는 복잡한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몸이 어제 같지 않아 못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고 북 치고 장구 치다가 영문도 모르는데 안 나오는 사람, 사진 찍을 때 마스크를 써서 민폐라는 말을 듣고 안 나오는 사람은 이미 설파한 내용이다.
뇌가 없다는 말로 잔잔한 가슴에 풍파를 일으킨 사람이 안 보이는 시점보다 먼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대부분의 화가 세치 혀로 인한 것이 많으니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시구를 생각나게 한다.
에리카는 생기발랄한 중년이다.
용모와 차림새가 젊어 보여 중년이라고 보기 어렵다.
요즘 말로 젊은 외모와 사고방식을 추구하는 영포티(young forty)를 올려서 영피프티(young fifty)라고 하고 싶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사고방식도 열려 있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환한 표정으로 말을 잘 건다.
길잡이인 내게도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다가와 이 얘기 저 얘기하며 잘 따랐다.
심지어 내게 자신의 롤모델이라는 엄청난 표현도 해주어 부끄럽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키득키득, 조잘조잘, 우릉부릉, 블라블라..... 옆에 붙어서 할 수 있는 얘기는 다 한 것 같다.
어디서 털어놓을 수 없는 자신의 고민도 털어놓으면 들어주고 맞장구도 쳐주다가 길벗 중에 마음에 드는 남자 이야기를 하면(아주 희귀한 사례) 고뤠에? 하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도 지쳐갈 무렵 다른 사람과 걷다가 사달이 났다.
그날도 내가 앞서 가는데 뒤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아, 거, 조용히 좀 하고 갑시다!
앞서 가던 내 귀에까지 들린 그 단호한 카리스마에 가지에서 쉬던 새도 푸드덕 날아가고, 불던 바람도 숨을 죽이고, 같이 걷던 길벗들도 발을 내딛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당사자인 에리카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발화자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며 중얼거렸다,
거참, 말이 많네. 시끄러워서 못 걷겠어.
에리카도 나의 길벗, 카리스마도 나의 길벗인데 그 사이에서 어쩌란 말이냐, 난 어쩌란 말이냐!
그날 에리카는 걷는 내내 시무룩해져서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안 나오면서도 자주 바뀌는 내 카톡 프로필에 '좋아요'를 누르고 매일 걸으며 즐겁게 사는 내가 부럽다고 글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는 자주 바꾸는 사진이 크게 뜨는 것이 모두에게 민폐일 거 같아 혈육들만 친구목록에 넣고 나머지는 모두 숨김 처리를 해버렸다.
그리고 한 장의 대표 사진만 볼 수 있는 멀티프로필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에리카로부터 카톡도 안 온다.
새로운 일을 한다고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한다고 바쁘다는 에리카 말대로 바빴으면 좋겠다.
내 카톡 사진을 보는 대신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아무쪼록 잘 되고 누군가 그녀의 말을 편견 없이 들어주는 사람이 생기기를 바란다.
물론 에리카가 내게 다시 문을 두드린다면 얼마든지 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장단 맞춰 줄 것이다.
시절인연이라 때가 되면 또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만났다가 헤어질 때는 인과 연이 흩어지는구나 하고 편하게 생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