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맞아 좋은 날

by Anima

매일 공지를 하는 내게 누군가 묻는다.

내일은 어디 걸어요?


글쎄, 나도 공지 봐야 알아요.

어제 걷기 전에 뭐 먹었어요?


가만있자...... 뭔가 매운 거 먹었는데 뭐였더라?


어제 누구랑 걸었어요?


아, 네 명인데 베, 리, 영 님, 한 명이 누구더라?


매일 이런 대화가 오간다. 나뿐만이 아니라 나이가 나이인 만큼 여러 길벗들이 깜빡깜빡한다.

모이기로 한 시간에 안 오는 길벗에게 전화를 걸었다. 번호가 저장되어 있으면 다행이다.


님, 오시는 길이지요?

엥, 오늘 걷는 날이에요? 깜빡 잊었어요. 집이에요.

네, 푹 쉬세요.

님, 왜 아직 안 오세요?


미안해요. 전철을 거꾸로 탔어요. 10분 정도 늦을 거 같아요. 식당으로 직접 갈게요.

님, 저 아니마예요. 딴짓하다가 내리는 곳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고 있어요.

길벗들에게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나이 탓이라고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됐나

기억을 더듬으며 그래도 몇 분 안에 생각나니 건망증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걸으면서 한 명이 참가하더라도 취소하지 않고 나간다.

오히려 남자일 경우 '저 혼자인데 취소하지 않고 걷나요?' 이런 문자가 온다.

어떤 길잡이는 그 한 명이 성별이 다를 때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서 취소하는 경우도 있다.

단둘이 걸으며 대화하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나이 불문, 성별 불문 무조건 나간다. 먹을 만큼 먹은 나이에 그런 것을 따져 무엇하리.

남자나 여자나 둘이 있으면 아무리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도 대화가 된다. 침묵의 시간은 길지 않다.

남자 길벗과 단둘이 걸으며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예닐곱 번은 될 것이다.


며칠 전에도 한 명만 신청을 해서 단둘이 오붓하게 걸을 생각으로 나갔다.

전철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30분 전에 전화가 왔다.

아, 풍 님, 오고 계시죠?


어헝, 아니마님, 이를 어째요? 감기 기운이 있어 약을 먹고 잤는데

아침에 알람 소리도 못 듣고 자다가 이제 일어났어요.


그럼 못 오신다는 말씀이네요. 일찍 좀 알려 주시지......


정말 죄송해요.

할 수 없지요, 뭐. 그런데 너무 하신 건 아시죠?

오늘 푹 쉬시고 다음에 뵈어요.

네, 정말 죄송하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마워요. 다음에 뵈어요.


죄송하다는 말에 심한 말도 못 하고 되돌아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그 허탈함은 그야말로 추위에 풍 맞은 모양이다.

일찍 일어나 밥 먹고 준비하는데 60분, 걸어 나오는데 10분, 전철 타고 30분,

허비한 시간이 총 100분이다.

이게 뭐냐고요? 감기가 갑자기 드냐고요?

조짐이 있으면 못 나온다고 미리 연락을 해야지요.


하루에 8,000보 이상을 걸으면 ‘손목닥터 9988’에서 하루 100원을 준다.

그것 받자고 걷겠냐만은 모아서 쓰레기봉투라도 사야지 했는데 손목닥터는 짠돌이다.

그것도 얼마 전에 200원에서 50% 삭감된 것이다.

꽃단장하고 일찍 서둘러 나온 것도 아깝고,

가계에 보탬이 되게 100원이라도 벌어볼까 하고

동네 한 바퀴 걷다가 길 건너 치과 간판을 보았다.


간판을 보기만 해도 이가 시려서 차일피일 미루던 스케일링과 진료도 할 겸 들어갔다.

예약을 하지 않아서 30분쯤 기다린 후에

아직도 튼튼한 어금니 4개는 나중에 탈이 나면 뽑아도 된다고 해서 스케일링만 받고 나왔다.


바람을 맞으려고 예정된 날이지만

미루던 스케일링도 받았으니

바람맞힌 길벗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보다.

바람맞아 좋은 날도 있구나!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