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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만드는 희희 Sep 15. 2020

팬데믹 시대의 낭만적 스크럼

줌zoom 회의 노하우


지난봄,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프리랜서가 아닌, 소속이 있는 상태로 재택근무는 처음이었다. 준비 과정은 번거롭고 당황스러웠다. 회사 데탑에 정리해둔 파일 옮기는 것부터 직통번호 착신, 격일 재택을 위한 출근 일정표와 회의 조율은 늘어난 '일'이었고, 소통이 잦고 스팟 회의가 많은 우리 팀이 대면하지 않고 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팀의 아침 루틴인 스크럼은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스크럼'. 애자일 씨의 그 스크럼 말이다.


데일리 스크럼의 대원칙은 이렇다. 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어제는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각자 이야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지막에 스크럼 마스터가 전체적인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것. 서로의 작업 상황을 최소 단위로 공유하면서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함이다.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출근 시간은 8시 30분. 40분부터 팀원 모두 투두리스트 판(떼기가 정확하겠다) 앞에 모여 각자 오늘 할 일을 공유하는 스크럼을 한다. 스크럼의 유일한 룰은 한 사람의 발표가 끝난 후 모두가 응원해준다는 것. 음소거 박수나(회사가 조용하다) 주먹을 쥐고 얍얍 기운을 주는 등 방법은 다양하다.

스크럼에는 고정 코너도 하나 있다. 시 낭독이다. 하루에 한 명씩 읽고 싶은 시를 읽는다. 팀원 간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스크럼과 효율과는 일억 광년쯤 떨어져 있을 법한 시라니. 애자일 씨가 놀랄 일이지만, 두 개의 다른 우주가 만나 우리만의 낭만적 스크럼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비대면 낭만적 스크럼'까지 시도하게 되었으니, 세 개의 우주가 만나게 된 셈이었다.


줌으로 편집 회의를 해보니

줌에 접속해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ID와 비번을 공유하며 조금 시끌시끌, 오디오나 화면이 작동 안 해서 조금 우왕좌왕, 인터넷이 불안정해 렉에 걸릴 때면 조금 어버버버했지만 제법 괜찮았다. 시 낭송도 이어폰으로 들으니 더 잘 들렸고, 한눈에 팀원 모두를 볼 수 있고, 화면 공유 기능으로 같은 자료를 보며 이야기하니까 집중도도 높아졌다. 단점이라면, 종종 튕겨나가는 오류와 렉. 그리고 표정이나 분위기로 나누는 비언어적 소통은 역시 어렵다는 것 정도.

특히 비대면 낭만적 스크럼에는 이에 걸맞은 새로운 세리머니도 등장했는데, 한 사람의 발표가 끝나면 각자 주변에 있는 인형이나 소품 등을 카메라에 들이대며(!) 응원해주기 시작한 거다. 이렇게 말이다.


줌에서도 왁자지껄


비대면 스크럼에 익숙해졌을 무렵 우리는 편집회의도 줌으로 진행해보기로 했다. 한 명씩 돌아가며 발표하는 방식의 스크럼과 달리 의견이 자주 오가고, 핑퐁핑퐁 대화가 필요한 편집회의가 과연 가능할까. 만일 가능하다면 뿔뿔이 지방에 흩어져 살아도 함께 책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어 이 테스트가 설레기까지 했다.


테스트 결과, 두 명이 대화할 땐 그런대로 잘 흘러갔다. 그런데 참여자가 세 명 이상이 되자 일종의 오디오 겹침 현상이 잦아졌고, 그럴 때면 급브레이크 밟듯 동시에 말을 멈추게 되어서 까마귀가 나는 무음 시간이 늘어났다. 평소 대면 회의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관찰해보니 문제의 원인은 단순했다. 바로 발신과 수신의 시차 때문.


서로의 말이 실제 발화한 순간보다 2-3초 후쯤 도착한다. 듣고 있던 사람은 상대의 말이 끝난 줄 알고 다음 말을 시작했는데, 아차차 몇 초 후 상대의 이어지는 말이 도착하는 거다. 그 순간 오디오 겹침 발생. 대면 회의에서는 표정과 호흡, 뉘앙스로 알아챘을 대화의 타이밍을 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웠고 시차까지 있어 대화의 스텝이 꼬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찾은 해결 방법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은 후 2, 3초쯤 더 기다렸다가 대화를 이어가는 것. 뉴노멀 시대의 상징 줌을 잘 쓰는 노하우가 결국 대화의 기본 태도인 경청 후 말하기라는 게 역설적이었다.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아니 시대가 종잡을 수 없이 변할수록 '기본'의 가치를 꽉 붙들고 싶다.


언젠가 화법 전문가에게 대화의 기술을 딱 하나만 알려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잘 말하려고 하기 전에 그냥 들으세요. 그게 첫째입니다."

엄지혜, <태도의 말들>


그런데 말이죠. 이렇게 줌 대화법을 익히고 나니 재택근무가 종료되었습니다. 그래도 작은 씨앗 하나를 얻었는데요. 탈서울 하더라도 '함께' 책 만드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과 호기심의 씨앗입니다. 가능, 하지 않을까요?


이런 곳에서도 책 만들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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