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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만드는 희희 Sep 24. 2020

일을 돌아보는 시간, 그래서 강의를 합니다

출판 강의 후기


처음 sbi 강의 제안을 받았을 땐 어리둥절했다. 그저 오래 일해온 것뿐인데, 내게 꺼낼 만한 이야기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내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쌓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궁금했다.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어느 강의든 맨 구석 자리에 앉는 나인데.) 매번 그렇듯 앞으로 뭘 하게 될지 깊이 고민도 안 하고 오케이를 외쳤다.


작년 출판예비학교 학생들의 낙서. 미래의 sbi들 잘 지내고 있나요?


그래서 대체 편집이란 무엇인가요

곧 강의 날짜가 잡혔다. 가제는 '편집 워크숍'. 오랜 시간 책을 만들어 왔지만 여전히 어렵고 매번 변수 투성이인 일. 그런 '편집' 일을 몇 시간 동안 정리해 말할 수 있을까.

우왕좌왕 커리큘럼을 만들던 밤, 지금까지 일해온 시간을 더듬거렸다. 아무리 헤집어도 지난 15년간 무얼 했나 싶을 만큼 잡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발견한 것들도 작디작은 데다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도 않았다. 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간 제대로 일을 해오기는 한 걸까.

이렇게 마음에 안개가 낄 때면 찾아가는 곳.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는 대답의 책, 표준국어대사전님께 묻기로 했다.


편집2 編輯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신문, 잡지, 책 따위를 만드는 일. 또는 영화 필름이나 녹음테이프, 문서 따위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일.


매일 하는 일인데 사전적 의미를 보니 낯설었다. 게다가 이렇게 담백하다니. 그렇구나. 편집은 '일정한 방침 아래' 만드는 거였지. 그 일정한 방침은 책마다 편집자마다 다르고, 때문에 정답처럼 떨어질 리 없잖아. 그렇다면 나라는 편집자의 일정한 방침을 정리하면 되는 거네? 몇 시간 동안 노트에 쓰고 지운 말들이 무색해졌다.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강의를 준비한다'는 것의 의미

그때부터 나의 일정한 방침을 찾기 시작했다. 방법은? 나와의 대화!(음?) 노트에 질문을 적고 거기에 답을 했다. 이때 모든 질문의 전제는 '나라는 편집자'의 생각과 경험 내에서라는 것.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었다.


이 수업에서 내가 다룰 '편집'의 범위는?
나라는 편집자만의 '편집' 정의는?
편집할 때 내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나만의 편집 노하우가 있다면?


답하기 위해 내가 알고 경험한 것들, 판단하고 선택한 것들을 들여다보며 생각의 체계를 잡아갔다. 시원하게 착착 정리되기를 꿈꿨으나, 여기저기 구멍들이 숭숭숭. 그럴 때면, 그렇게 구멍이 보일 때면, 공부를 했다. 책을 읽고, 다른 분야의 자료도 찾고, 고객이론 시조새인 주간님을 붙들고 묻기도 하며 공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뭐야, 나 강의 준비하는 거 아니었어? 회상하고, 자아탐구하고, 공부하고 지금 뭐 하는 거지?!'

오리고 붙이고 하며 흐름 짜는 중. 원고 목차를 짤 때도 이렇게 합니다.


이 강의로 가장 많이 공부하게 된 건, 학생들이 아니라 나였을 거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아웃풋만 하다가 오랜만에 해보는 업무 관련 공부는 놀랍게도 재밌었다. 내가 숨 쉬듯 하고 있는 일들을 일의 논리로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직업인이 되어 처음 겪는 '일하는 자아 탐구'이자 나의 '일 논리 탐구' 과정. <논픽션 편집 워크숍>이라는 제목으로 피피티까지 완성하고나니 어지럽혀둔 집을 정리한 듯 가볍고 상쾌하기까지 했다. 4회 강의를 위해 한 달간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쉬지 못했지만 그 기분이 좋아서, 그 과정에 얻은 것들이 커서 후회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차, 2기를 맞은 지금. 지난해 자료를 꺼내보고는 알게 되었다. 지난 1년간 많이 변했구나. 그리고 이 정도 성장했구나. 소모한 줄 알았던 1년인데 고맙게도 시간이 차곡차곡 쌓아주었다.


여러 편집자님과 함께하는 한겨레교육 강의후기. 감사해요


책 만드는 걸로도 숨 가쁘고, 놀기에도 바쁘고, <아들과 딸>도 봐야 하는데... 그럼에도 계속 수업을 이어가는 건 준비 과정이 마치 일의 연말결산 같아서다. 일 속에 있을 때는 몰랐던 일하는 나를 볼 수 있어서. 학생들이 취업했다며 소식을 전해올 때, 첫 명함을 건네줄 때, 수강후기들을 읽을 때의 보람도 당연히 크다. 그리고... 강의 준비를 할 때면 글 쓰는 것도 재밌어진다(역시 종류와 상관없이 딴짓은 재밌다...).


올해 sbi 16기들이 그린 그림. 칠판 메모는 전통이 되었는가ㅎㅎ


<아들과 딸> 포스팅이 조용한 이유. 이렇게 긴 글을 쓸 수 있는 이유. 일 연말결산 중이어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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