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

27화

by 빈자루

*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구."


쥐가 팝콘 통을 뒤지며 말했다.


"아무리 뒤져도 빈 통에는 팝콘이 없는 법이라구."


내가 팝콘 통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쥐가 말했다.


"빌어먹을 팝콘 따위 지옥에나 떨어지라지."


나는 그를 쳐다봤다.


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었다.


따분한 영화.


따분한 주인공이 나와.


따분한 악당을 죽이고.


따분하게 세계 평화를 되찾는 줄거리였다.


쥐와 나는 따분하게 영화관을 나왔다.


"괜찮은 영화였지?"


쥐가 물었다.


"물론. 누군가가 자꾸 빈 통에 손을 넣던 것만 뺀다면."


내가 대답했다.


쥐가 하품을 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쥐가 물었다.


"봤어?"


"뭘?"


내가 되물었다.


"아까 블랙 위도우의 스턴트 장면에 나오던 여자."


쥐가 이어 말했다.


"귀였어."


"그래. 그런 것 같더라."


내가 답하며 그의 옆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

우리가 슈퍼 파워 거대 괴물 로봇에게서 빠져나온 날 저녁, 귀는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어떤 메시지도 어떤 소지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자기 내 삶에 전화벨처럼 들이닥쳤던 그녀는,


뚝 끊기는 통화처럼 내 삶에서 사라졌다.


쥐는 그녀가 떠난 것이 그녀 스스로 너무 많은 책임감을 짊었졌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브레인 롯들은 어떻게 무찔렀어?"


내가 물었다.


"묵찌빠로 간단히 제압했지."


쥐가 대답했다.


사는 게 고달픈 사람은 무얼 해도 고달프게 생각하는 법이다.




*

귀 :


귀는 돌고래를 구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무능력함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슈퍼 파워 거대 괴물 로봇의 데이터 저장소를 무너뜨린 날, 일행들이 기쁨에 차 한국으로 가는 짐을 꾸리고 있을 때 그녀는 미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제이와 행복하세요.


기린에게 남길 메모를 썼다 지우길 반복했다.


모두가 잠든 밤 홀로 그녀는 일행들의 숙소에서 빠져나왔다.




일단은 주거안정이 우선이었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카페에서 서빙을 했다.


"Shit, I didn't come this far just to scrub plates."


언어의 장벽도 해결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월세는 비쌌고, 늦은 밤까지 식당에서 일을 하다 돌아오면 돌고래 추적은커녕 TV를 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한국에서 제육볶음과 김치 칼제비를 원 없이 퍼먹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때쯤, 래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Hi."


"Hi, nice to meet you."


말하자면 이건 파블로프의 개 같은 거였다.


귀가 말했다.


"본론만 말해요. 설마, 저번에 내가 입힌 상해에 대해 보상청구를 하겠다는 건 아니죠?"


"오우 노우. 미스 귀. 이건 완전 좋은 소식이에요. 빅뉴스, 구두 뉴스!"


귀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좋아요. 말해봐요."


"당신 캐스팅됐어요. "It’s not just luck. It’s your fate."


Bullshit.


운명이란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어쨌든 래리가 말한 페이는 마음에 들었다.


귀가 슈퍼 파워 거대 괴물 로봇의 집 앞에서 래리의 복부에 뒤돌려차기를 꽂아 넣을 때, 감시 카메라가 그 장면을 찍었던 것이다. 영상은 유튜브와 트위터를 통해 빠르게 퍼졌고, 그 영상을 본 영화계 관계자들이 귀를 캐스팅하겠다고 귀를 찾다가 래리에게까지 연락이 간 것이었다. 할리우드의 정보력은 돌고래 다리 클럽의 정보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God bless you."


이제 고무장갑을 벗을 수 있다는 희망에 귀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https://youtu.be/ADtUW61RW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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