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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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
스칼렛 요한슨은 의외로 털털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면접장에서 만났던 그녀는 래리에게 꽂았던 뒤돌려차기를 나에게 연거푸 요구했다. 뒤돌려차기를 할 때마다 스칼렛은 "Jesus!", "Oh my god!", 하며 신들을 연거푸 소환했다. 나는 오디션에 합격했다.
스칼렛은 슈팅 현장에서도 나에게 각별했다.
"귀, 이 장면에서는 나의 빼어난 몸매가 드러나는 게 중요해. 섹쉬하지만, 너무 노골적이지는 않게. 유 노 왓 암 민?"
나는 다시 뒤돌려차기를 했다.
스칼렛과 스태프들은 다시 신들을 연달아 소환했다.
촬영이 끝나고 스칼렛이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스칼렛은 전 남편들과 이혼하고 아이들을 혼자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험이 많았다.
"아이 노우, 아이 노우, 아이 노우 왓 츄 쌔잉."
돌고래를 만나고, 제이미 케인러너의 연구 자료를 찾고, 기린을 만나며, 슈퍼 파워 거래 괴물 로봇을 무찌르러 구글의 본사에 쳐들어 갔던 일, 그리고 차마 기린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사정들까지도, 스칼렛은 모두 다, 하나도 빠짐없이 공감해 줬다. 할리웃이 이래서 할리웃 할리웃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죽은 제이미 케인러너가 기린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말이 이해가 되세요?"
내가 물었다.
"캡틴 아메리카, 위터 솔저 편. 아르님 졸라. 귀, 마블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마블 노우즈 에브리씽."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참, 남자란 이상한 동물들이죠. 어째서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여자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건지. 데이아 콤플릿틀리 올 이디엇츠. 바보 멍청이들이에요. 바보 멍충이!"
슈퍼 파워 거대 괴물 로봇의 방에서 기린의 속마음을 알고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말에 요한슨은 흥분했다.
나는 말없이 모스카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 쇄골 아래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세요? 그들은 정말 이기적이고 어리석어요. 그들이 좋아하는 건 자기 자신 밖에는 없어요! 그들은 자기 밖에 몰라요. 데이아 올 모론!"
나의 격양된 외침에 스칼렛이 순간 움찔했다. 인크레더블 헐크,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저, 호크 아이. 그녀를 스쳐갔던 많은 영웅들을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은 스칼렛이 차분하게 말했다.
"귀. 유아 쏘 뷰티풀. 앤 영. 나도 이 남자 저 남자 다 만나 보고, 차기도 하고 차여보기도 해서 알아요. 유아 펄팩틀리 롸이트! 얼간이들 신경 쓰지 말고 즐겨요. 저스트 don't waste your life — live for yourself!"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 언덕으로 올라갔다.
해는 지고 있고, 별은 뜨고 있었다.
화려한 도시의 조명들이 보라색 지평선 멀리까지 반짝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하나가 외로이 내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가로등 아래 벤치에 조심스레 앉았다.
힐 속에서 종일 시달리던 발가락이 고통에 소리를 치고 있었다.
다리를 접어 힐을 벗어던지고 가방에 숨어 있던 편안한 슈즈를 꺼내 가지런히 놓았다.
멀리서 낮고 부드러운 멜로디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멜로디 속에서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걸어 나왔다.
팬시하지만 잘 다려진 셔츠에 반쯤 풀린 넥타이가 그의 턱 밑에서 흔들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걸어오던 남자는 내가 앉은 벤치의 끝에 조용히 걸터앉았다.
가로등 불빛이 그와 나를 비추고 있었다. 단정한 이마 아래로 그의 긴 눈매와 가느다란 코가 드러났다. 밤 바람에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Hi."
맙소사.
라이언 고슬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