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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이장수. 서울 마포구에 거주한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마흔세 번째로 맞는 크리스마스 전야이다.
오늘 밤도 나는 잠들지 않는다. 기어코
그 복면 사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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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얘기한다. 산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33년 전 내 손에 닿았던 그 복면 사내의 붉은 코발트식 의장과 거품 같은 수염은 무엇이란 말인가.
- 누구세요?
눈을 비비며 묻는 질문에 사내는 놀라 사라졌지만 내가 본 것은 분명 산타였다.
- 행복하게 자라렴.
편지에는 그렇게 한 줄이 적혀있었다. 그것은 삼십 년 동안 내 좌우명이 되었다. 같은 학급에 다니던 졸개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뻥치지 말라며 놀렸지만, 흥, 엿이나 먹으라지. 졸개들 눈엔 세상 모든 것이 거짓으로 보일 테니까. 오늘 나는 진실과 마주한다. 이 진실은 그동안 거짓으로 가려졌던 세계에 빛을 비춰줄 것이다. 진실은 드러나야 한다.
부스럭.
현관 쪽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몸을 낮춰 천천히 소파 뒤로 숨었다.
- 거기 누구입니까?
몸을 낮춘 채 어둠을 향해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나는 무릎으로 기어 신발장 근처까지 다가갔다.
- 거기 누구입니까?
그때, 다시 소리가 났다.
드륵. 툭.
무언가 바닥을 긁는 소리. 그리고 둔탁한 낙하음. 나는 장식장 뒤로 몸을 날렸다. 마침내 마주한 진실. 그곳엔 복면 사내도 붉은 코발트식 의장도 없었다. 대신 한 사내가 머리를 웅크린 채 전등 빛을 맞고 있었다.
- 아버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왜 여기에?
- 아버지 왜 여기 계시죠?
- 들켰네.
아버지는 무안한 듯 쥐고 있던 검은 봉지를 뒤로 숨겼다.
- 아버지셨어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기침을 뱉었다.
- 그동안 아버지셨던 거예요?
- 그래 나였다.
아버지는 체념한 듯 뒤로 숨겼던 검은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봉지 사이로 삐져나온 것은 루돌프의 머리띠와 산타 가면이었다.
- 하지만 아니라고 하셨었잖아요? 도대체 왜?
- 믿게 해주고 싶었다.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 산타가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 너는 그 말을 40년이 넘도록 믿더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 하지만 나를 속이신 거잖아요. 무려 사십 년이 넘도록.
- 너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는 너를 보는 것이 즐거워서 그랬다.
검은 봉지에서 귤이 빠져나와 바닥으로 굴렀다. 주황색 귤 하나가 굴러와 내 발등에서 멈추었다. 그간 어딘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사람들의 희한했던 표정들이 뇌리를 스쳐 갔다. 무언가 말을 해주고 싶은데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던 직장 상사들. 헤어진 여자 친구의 오묘했던 눈빛. 이 새끼 또라이네 라며 빤히 쳐다보던 군대 선임들. 이제야 모든 것의 퍼즐들이 맞춰졌다.
- 그럼 군대에서는요?
- 소대장에게 부탁했었다. 아들이 산타를 믿게 해달라고.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산타 할아버지가 군대까지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갔다고 신나서 자랑하며 내무반을 뛰어다녔던 것이 창피해 지금이라도 머리를 박고 차렷을 하고 싶었다.
- 스물네 번째 크리스마스는요? 그때는 선물을 안 주셨잖아요?
- 그땐 네가 울었잖니. 울어서 주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한번쯤은 건너뛰어야 더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
산타에게 선물을 받지 못해 풀이 죽어 있던 나에게 아버지는 그날 순댓국과 소주를 사주시면서 힘을 내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나는 산타에게 선물을 받기 위해 담배를 끊었다.
- 그래서 거짓말을 하신 건가요?
내가 물었다.
- 그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구나.
- 왜 그러신 거죠? 대체 왜?
- 네가 행복하게 자라길 바랬으니까.
*
내 이름은 이장수. 서울 마포구에 거주한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마흔네 번째로 맞는 크리스마스 전야이다. 나는 더 이상 산타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산타를 믿고 있는 아이들이 산타를 계속 믿게 하는 것이 나의 임무다. 나는 오늘도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맨다.
- 행복하게 자라렴.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한다. 이제
출동하러 갈 시간이다.
본 소설은 주인공의 이름만 같을 뿐 연재 중인 '세무사 이장수'의 스토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이가 내년에 4학년인데 아직까지도 산타할아버지를 믿고 있네요. 저도 한 3학년까지는 믿었던 것 같은데... 누군가에게 산타가 된다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나중에 깨닫게 되면 씁쓸하겠지만, 최대한 천천히 깨닫게 해주고 싶네요. 행복은 가끔 거짓말을 통해 피어나기도 하니깐요. 내일은 날이 엄청 춥네요.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