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대기는 허공을 갈랐을 뿐인데 너는 이미 누구의 목을 칠지 정해두었구나. 이쪽을 치면 저쪽이 옳다 하고 저쪽을 치면 이쪽이 옳다 할 터. 베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스승이 사라진 자리에 작대기 하나가 굴러있었다. 장수가 허리를 굽어 그 작대기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처음 스승을 찾아온 자는 무림맹주 정사홍이었다. 이슬비가 내리는 밤이었고 달이 초가에 걸려 있었다. 정사홍의 호위가 사립문을 밀치는 바람에 울타리에 대어놓았던 우산이 쓰러졌다. 정사홍이 탄 가마의 가마꾼들이 우산을 밟고 지나쳤다.
"스승님. 무림맹주 정사홍께서 스승님 뵙기를 청하옵니다."
"..."
스승은 기척이 없었다.
장수가 다시 말하였다.
"스승님. 무림맹주께서 오셨습니다."
정사홍의 호위들이 내게 어서 방으로 올라가 스승을 깨우라고 신호를 보냈다. 사홍이 이를 가로막았다. 장수가 낮게 다시 스승을 불렀다.
"스승님. 주무십니까."
세 번만에 방에서 소리가 나더니 스승이 잠뱅이 차림으로 마루청을 밟고 나왔다.
"... 허. 송구합니다... 늙은 놈이 귀도 어두워 그만..."
벌어진 옷깃을 여미는 스승의 가슴팍엔 검버섯 핀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 사홍의 눈길이 스승의 앙상한 뼈가지에 닿자 딱딱하던 그의 낯빛이 간교하게 변했다.
그가 뱀 같은 웃음을 지으며 스승에게 말했다.
"이곳에 훌륭한 뜻을 품은 분이 계시다 하기에 몇 마디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
"..."
"..."
스승은 또 말이 없었다.
"..."
"..."
"..."
스승이 곤란하다는 듯 쭈그러진 손가락으로 이맛살을 긁었다. 웃고 있는 사홍의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
"..."
"..."
정사홍이 침착하게 얼굴을 펴고 다시 스승에게 말하였다.
"근래 무림이 시끄럽습니다. 법과 정의를 멋대로 해석하는 자들로 인해 그 혼란이 양민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양민들을 위해 부디 한 말씀만 하시지요."
"..."
"..."
"..."
스승은 멋쩍게 고개만 갸우뚱했다. 뭔가를 말해달라는 사홍의 재촉에 무슨 말을 듣고 싶냐는 듯 되려 사홍을 빤히 쳐다 볼 뿐이었다.
벙거지 같은 스승의 응대에 사홍의 눈가가 찌그러졌다.
"대협. 한 말씀만 하십시오."
"..."
스승이 말없이 사홍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사홍의 눈알이 빠르게 굴러갔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찻물을 찔끔 들이켰다. 사홍이 말했다.
"대인. 과연 대인의 뜻이 이리도 깊은 줄 몰랐습니다. 허허. 찻물은 입안의 가시를 녹이는 법이지요. 무림맹주 정사홍. 대인에게 깊은 뜻을 받아갑니다."
사홍이 찻잔을 내렸다.
스승은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사홍의 호위와 가마꾼들이 문을 나서며 침 뱉는 소리가 서까래 아래까지 번졌다. 무리가 크게 길닦음 소리를 내며 빈 길 아래로 사라지자 장수가 물었다.
"스승님 어찌 무림맹주 앞에서 반로환동을 감추셨습니까? 저들은 무림 최고의 세를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스승이 난처한 표정으로 쭈그러진 이맛살을 문질렀다.
"..."
"..."
"... 어찌 아이의 모습으로 저들에게 힘을 보탤 수 있겠는가."
"스승님..."
"저들에게 정의란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 말고는 없네. 그렇다면 그것은 정의라 할 수 없지."
이어 스승이 말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정의란 그저 부모의 사랑일 뿐이야."
장수가 더는 스승의 말에 덧을 댈 수 없었다.
*
"... 밖에 우산을 대어두게."
며칠 후 비를 보던 스승이 말하였다.
그날 저녁 김사인이 단신의 몸으로 무림촌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의 차림에 삿갓을 쓴 그는 굵은 빗방울을 몸으로 받으며 저벅저벅 사립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스승은 이미 대청에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차를 한잔 드시지요..."
사인이 앉은 자리에서 빗물이 옷을 타고 흘러 바닥에 고였다. 사인이 말없이 입술에 찻잔을 가져다 대었다.
"..."
"..."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해가 지고 사위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빈 달이 걸리고 쏙독새 울음 소리가 고요를 대체했다. 이윽고 사인이 입을 열었다.
"천하는..."
"..."
"... 누구의 것입니까?"
스승은 답이 없었다.
사인도 더는 묻지 않았다.
스승이 말없이 사인의 빈 잔에 우러난 잎차를 채워주었다. 사인이 쓸쓸히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사립문 밖에서 주인 없는 들꽃들이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
"..."
빈 달이 내려오고 들꽃들이 비의 무게를 이겨 고개를 들 때가 되어서야 사인은 돌아갔다. 그가 앉았던 자리를 장수가 마른걸레로 쓸며 물었다.
"스승님. 저분은 강호에서 의협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분입니다. 어찌 그 분과 한마디 말씀도 나누지 않으셨습니까."
스승이 장수를 물끄러미 보며 말하였다.
"... 아이란 본디..."
스승이 말을 이었다.
"어여쁘고 약한 존재여서 어느 집에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네..."
스승의 말소리가 계속되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 그것을 나누려 하는 것은 의협이 아닐세."
스승이 천천히 사립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립문 밖에선 들풀들이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들풀을 바라보았다. 해가 무림촌 전체에, 고르게 쏟아지고 있었다.
해가 무림촌 전체에 고르게 쏟아지듯 들풀들이 비에도 지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일부 수정 사항이 있어 안내드립니다. 소설의 현재 시점은 장수의 1인칭 시점으로, 과거 회상 장면들은 3인칭 시점으로 서술할 예정입니다. 혼동 드려서 죄송합니다.